핏줄이 끊어진 자리, 하늘이 답하다

신라 금관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옥 장신구가 정교하게 드러난 고대 왕관의 모습
핏줄과 정당성의 상징, 신라의 금관(Silla Gold Crown).

핏줄이 끊어진 자리, 하늘이 답하다

신라 벌휴 이사금과 권력 정당성의 기원 (154~184)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 2026.08.21

왕관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 사회는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누가 다음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가.
그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핏줄인가, 능력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믿음인가.

이 질문은 새롭지 않다. 국가가 형성된 이래 모든 공동체가 던져온 질문일 수 있다.
다만 시대마다 답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답이 갈리는 지점, 왕위가 대를 이을 후손 없이 끊어지는 그 찰나야말로
한 사회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3세기 후반 백제, 책계왕과 분서왕이 낙랑·대방과 충돌하며 무너져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신라로 올라간다.
서기 2세기 후반, 사로국. 박씨의 왕위가 끊어지고 낯선 성씨가 그 자리에 앉는다.

154년, 박씨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아달라 이사금은 154년 봄 즉위했다.
파사왕의 후손이자 박씨 왕가의 적통이었다. 그의 치세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실용적이었다.
156년 4월, 계립령(현재 문경 하늘재 인근으로 추정)의 길을 열었고 158년 3월에는 죽령을 뚫었다.
두 고갯길 모두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내륙 깊숙이 통하는 통로였다.
군사보다 먼저 길을 낸 왕이었다.

그러나 아달라 이사금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184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로국은 처음으로
박씨 혈통 바깥에서 다음 왕을 찾아야 했다.

그 자리에 선 인물이 벌휴 이사금이다. 그는 박씨가 아니라 석씨였다.
삼국사기는 그를 두고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다. 바람과 비를 미리 헤아렸고,
사람의 마음속 사특함과 정직함을 알아보았다고 전한다. 점술이나 예지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통치자로서 필요한 통찰력과 판단력을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 불렀고, 결국 그를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혈통이 끊긴 자리에, 사람들은 능력과 신망을 가진 자를 세웠다.
박씨에서 석씨로. 이것은 신라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조 교체의 원형이었다.

같은 해, 다른 하늘 아래 — 184년의 세계

공교롭게도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 서쪽으로 아득히 떨어진
한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권력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184년, 태평도를 이끌던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이다.

한나라 조정은 이미 오랫동안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왕조의 정당성을 더는 신뢰하지 않았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종교적 카리스마였다. 장각은 자신을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자로 내세웠고,
수십만 명이 그를 따라 봉기했다.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한나라는
이후 회복하지 못했다. 지방 군벌이 실권을 쥐기 시작했고, 삼국시대라는
분열의 시대로 이어지는 첫 균열이 바로 이 해에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 로마 제국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184년 로마는 콤모두스
황제의 치세 아래 있었다. 그는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아들로서, 180년 부황의 죽음과 함께 제위를 이었다. 문제는 이 계승
방식 자체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전 네 명의 황제는 모두 양자
입양을 통해 가장 유능한 인물을 후계자로 선택해왔다. 콤모두스의 즉위는
그 전통이 혈통 계승으로 되돌아간 첫 사례였다. 그는 곧 정무를 등한시하고
검투사를 자처하며 원로원과 충돌했고, 그의 치세는 이후 로마사가 이야기하는
‘쇠퇴의 시작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같은 해, 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사로국은 신망 있는 인물을 추대해 혈통의 단절을 메웠고, 한나라는 혈통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지며 혼란에 빠졌다. 로마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능력 중심의 양자 계승이 혈통 계승으로 되돌아가면서
쇠퇴가 시작되었다. 세 나라 모두 표면은 달랐으나 저류에는 같은 질문이
흐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핏줄만으로는 더 이상 권력을 지탱할 수 없을
때, 또는 핏줄로 되돌아갔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다음 지도자를
인정하는가. 장각이 만들어낸 것은 체제 외부에서 종교적 선동을 통해
새로운 정당성을 창출하려는 시도였다. 벌휴 이사금이 얻은 것은 체제
내부에서 이미 공동체가 요구하던 기준, 즉 신망과 통찰력을 수용받은
결과였다. 그리고 로마는 검증된 능력 대신 혈통을 다시 선택함으로써,
정당성의 기준을 스스로 후퇴시킨 사례로 남았다. 정당성의 공백은 늘
다른 무언가로 교체된다는 점에서, 세 사건은 하나의 구조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현된 결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바람과 비를 아는 자 —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法不阿貴 (법불아귀)
“법은 신분이 귀한 자라 해서 아부하지 않는다.” — 『한비자』 유도(有度)

한비자는 권력의 본질을 이렇게 짚었다. 이 구절은 본래 법 집행의
공평무사함을 강조하는 문맥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읽을 수 있다.
세습된 권위나 혈통조차 공동체의 객관적 기준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벌휴 이사금의 즉위 역시 혈통의 경직성을 넘어
공동체가 바란 통찰력에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위험이 함께 따른다. 능력과 신망이라는 기준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을 누가 판단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정당한 추대가 될 수도, 선동에 의한 찬탈이 될 수도 있다.
벌휴 이사금과 장각은 둘 다 하늘의 뜻을 읽는다고 여겨진 인물이었다.
한쪽은 체제 내부에서 정당성을 수용받아 왕이 되었고, 한쪽은 체제
외부에서 정당성을 만들어내려다 반란의 수괴로 역사에 남았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갈렸는지, 단순한 결과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정당성의 공백은 언제나 다시 찾아온다

혈통의 정당성이 무너지는 순간은 고대 왕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당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번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선거라는 절차적 정당성은 그 자체로 이미 신뢰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다만 최근 한국 정치에서 반복된 정권 교체와 뒤이은 극심한
진영 갈등은, 절차적 요건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신뢰가 저절로 완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법적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과 공동체의 진정한 신뢰를 얻는 일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사법부 또한 이 간극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판결이 법전의
문언과 절차를 정확히 따랐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결이 공동체의 신뢰까지
자동으로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차적 정합성을 방패 삼아 신뢰의
문제 자체를 회피하려 할 때, 그 간극은 채워지는 대신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 1,800여 년 전 사로국 사람들이 벌휴 이사금을 왕으로 세우며
확인하려 했던 것도 결국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절차를 넘어 신뢰로
완성되는 자격, 역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근거로 지도자를 인정하고 있는가.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는 권세 있는 자의 성을 오르며 그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느니라’ — 잠언 21:22


¹ 벌휴 이사금의 즉위와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근거하며, 바람과 비를 헤아렸다는 서술은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되어 왔다.
² 황건적의 난과 관련한 서술은 후한서 및 삼국지 위서의 기록에 근거한다.
³ 阿達羅尼師今·伐休尼師今의 재위 연도는 삼국사기 기년 기준이며, 일부 학설은 초기 신라 왕력의 연대 정확성에 이견을 제기하고 있다.
⁴ 콤모두스의 즉위(180년) 및 오현제 양자 계승 전통과 관련한 서술은 로마사 통사(예: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등)에서 통용되는 서술에 근거한다.

관련 글: 3-백제-③ 책계왕·분서왕 — 낙랑·대방과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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