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년, 형은 왕이 되지 못했다 — 산상왕과 로마 황제가 공유한 계승의 법칙
같은 해, 다른 대륙에서 반복된 권력의 문법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 2026.08.05
197년, 유라시아 양 끝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고구려의 왕후 우씨(于氏)였고, 한 명은 로마의 야심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서로의 존재는 물론 서로의 대륙조차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기 197년 같은 해에 같은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 — 죽은 권력자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인가, 그리고 그 결정은 결국 누구의 손에서 내려지는가.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읽고 넘어갈 사건이 아니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이 같은 해에 같은 방식으로 흔들렸다는 사실은, 인간이 권력을 다루는 방식에 어떤 보편적인 문법이 존재함을 일러주는지도 모른다.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후 우씨(于氏)는 밤중에 은밀히 움직였다.
왕의 죽음을 숨긴 채 첫째 시동생 발기를 찾아가 “왕위를 이으라”고 떠보았고, 발기가 부인을 향해 호통을 치며 거절하자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둘째 시동생 연우를 찾아갔다. 다음 날 아침, 연우는 고국천왕의 유언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산상왕이다.
서열로 보면 형인 발기가 있었지만, 그날 밤 결정권을 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왕후였다.
같은 해, 로마에서는 군단의 창끝이 그 결정권을 대신하고 있었다. 193년 페르티낙스 황제가 근위대에게 살해된 뒤, 로마는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다섯 황제의 해”로 빠져들었다.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군대를 앞세워 로마로 진격했고,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카이사르(후계자)”로 인정하며 잠정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면서 동맹은 깨졌고, 197년 2월 19일 갈리아의 뤼그두눔(현재의 리옹)에서 두 세력은 정면으로 충돌했다.1 카시우스 디오는 이 전투를 “로마군끼리 벌어진 가장 큰 싸움”이라 기록했다.2 세베루스가 승리했고, 알비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로원은 이 싸움의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 결국 승자가 결정된 뒤, 그 승리를 사후 추인하는 제스처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한쪽은 왕후의 침실 정치, 한쪽은 삼십만에 가까운 병력이 맞붙은 회전(會戰)이었다.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이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다. 정당한 계승 서열이 있었음에도, 실제 권력을 쥔 자는 그 서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발기에게는 명분이 있었지만 군대가 없었다. 산상왕에게는 명분이 약했지만 왕후의 지지와 귀족 세력의 묵인이 있었다. 알비누스에게는 “카이사르”라는 공인된 지위가 있었지만, 세베루스에게는 다뉴브와 게르마니아의 정예 군단이 있었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계승의 정당성은 서열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그 서열을 관철시킬 힘에서 나오는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을파소의 진대법 개혁 — 국가는 왜 가난한 자를 먹여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3 197년의 산상왕 즉위는 그 을파소가 훗날 국상으로 다시 등용되는, 바로 그 왕의 즉위담이다.)
발기는 무엇을 잘못 계산했는가
발기의 반란은 처음부터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소노부(消奴部)라는 국내 기반이 있었고, 명분도 뚜렷했다 —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발기의 외침은 삼국사기에 그대로 기록될 만큼 당대인들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4
문제는 그가 자신의 명분을 힘으로 관철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왕궁을 사흘간 포위했지만 국내성 안에서 그를 따르는 세력이 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요동으로 도망쳐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리는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이 발기를 역사 속에서 두 겹의 패배자로 만들었다. 군사적으로는 산상왕의 동생 계수(罽須)에게 격퇴당했고, 정치적으로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조국을 공격한 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명분을 지키려다 명분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꼴이 되었을 수 있다.
알비누스의 실패도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는 세베루스로부터 공식적으로 “카이사르” 지위를 받은, 흠잡을 데 없는 후계자였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동맹을 파기하자, 그가 선택한 것은 협상이 아니라 브리타니아 3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역시 자신의 정당성을 로마 중심부의 정치가 아닌, 지방 군단의 무력으로 지키려 한 인물이 되었다. 뤼그두눔의 패배 직후 그가 선택한 자결은, 요동에서 생을 마감한 발기의 마지막과 어딘가 닮아 있다.
발기와 알비누스는 각기 다른 대륙에서,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 명분을 군사력으로 지키려는 순간, 그 명분은 이미 명분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놓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권력은 어디에서 정당성을 얻는가
“권력이란 남을 이기는 수단이다(權者,勝人之資也。).” — 한비자
서열이나 명분이 아무리 견고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실질적인 힘이 없으면 권력은 저절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산상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후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통해 귀족 세력의 묵인이라는 실질적 기반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명분의 정당성이 아니라, 기반의 실재성이 그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한비자적 해석만으로는 이 사건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군주가 힘으로 권력을 얻더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안정시키는 기술이 따라야 한다.” — 마키아벨리
힘으로 얻은 권력은 힘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산상왕은 즉위 직후부터 국내성의 동요를 다스리기 위해 발기의 잔여 세력을 회유하고, 훗날 환도성 천도라는 새로운 국가 기획으로 정통성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세베루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승리 직후 그는 스스로를 죽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로 선언했다. 심지어 폭군으로 낙인찍혔던 콤모두스마저 자신의 “형제”로 끌어안았다.5 피로 얻은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혈통을 사후적으로 이식해 넣은 것이라는 해석의 여지가 크다.
힘으로 오른 자리일수록, 그 다음 수순은 대개 명분의 사후적 재건으로 이어지곤 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서열, 명분, 그리고 실권 — 세 가지가 어긋날 때
197년의 두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패턴이 뚜렷해진다. 계승의 위기는 서열, 명분, 실권이라는 세 가지 축이 어긋날 때 폭발한다는 것이다. 발기에게는 서열과 명분이 있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산상왕에게는 실권을 만들어낼 관계망이 있었지만 서열이 없었다. 알비누스에게는 공인된 명분이 있었지만 로마 중심부의 실권이 없었다. 세베루스에게는 처음엔 아무 명분도 없었지만, 군단이라는 압도적 실권이 있었고 승리 이후 명분을 사후적으로 조립해냈다.
결국 역사가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은, 계승의 위기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쪽은 서열이 정당한 쪽이 아니라, 서열과 실권의 간극을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메운 쪽이라는 사실이다. 발기와 알비누스는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무력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두 사람 모두 파국을 맞았다. 산상왕과 세베루스는 간극을 메울 시간과 관계, 그리고 사후적 정당화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패턴은 왕조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명분과 서열이 실권과 어긋나는 순간, 그 조직이 국가든 기업이든 정당이든 동일한 균열이 관측되곤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형을 돌아보아도 이 오래된 질문은 본질을 달리하지 않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정통성을 주장하는 명분과 실제 조직·여론을 움직이는 실권이 어긋날 때, 그 간극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메워지기 마련이다. 197년 국내성의 밤과 뤼그두눔의 새벽이 그러했듯, 그 간극이 메워지는 방식이야말로 다음 시대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
산상왕은 227년까지 30년을 통치했다. 세베루스도 211년까지 로마를 다스리며 세베루스 왕조를 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을 남긴다. 오래 다스렸으니, 그의 즉위는 옳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결과가 원인을 정당화하는 방식일 뿐이다.
발기의 자리에서, 알비누스의 자리에서 197년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같은 사건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승자의 서사를 좇지 않는다. 그 서사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 명분과 실권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던 그 짧은 틈을 붙잡으려 한다. 국내성의 밤. 뤼그두눔의 새벽. 아직 아무도 승자가 정해지지 않았던 그 시간, 우리는 그 미묘한 순간을 너무 쉽게 스쳐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참고할 말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 시편 133:1
각주
1. 뤼그두눔 전투, 197년 2월 19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현 프랑스 리옹) — Battle of Lugdunum, Wikipedia; History Hit
2.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 뤼그두눔 전투를 로마군 간 최대 규모 교전으로 기록
3. “을파소의 곳간” (2026.08.03 발행) — 진대법과 국가 구휼의 기원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4, 산상왕조 — 발기·연우 왕위 계승 분쟁 기록
5.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계보 조작(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양자 선언, 콤모두스 형제 선언) — Septimius Severus,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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