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조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민연금, 고래가 된 수탁자의 딜레마
2026년 5월 · 경제·국방 · Watchman
코스피가 7,800선을 횡보하는 동안, 시장 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력한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국민연금이다.
2025년 말 1,458조 원이던 국민연금 적립금은 코스피 폭등에 힘입어 5개월 만에 약 1,800조 원에 육박했다. 2026년 2월 말 기준 국내주식 보유액만 약 395조 원. 전체 자산의 24% 이상이 국내 주식으로 채워져 있다. 원래 목표였던 2026년 말 국내주식 비중 14.9%를 이미 10%포인트 가까이 초과한 상태다.
규정대로라면 약 150조 원 규모의 주식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팔기 시작하면 코스피가 흔들린다. 팔지 않으면 원칙이 무너진다. 이 딜레마 앞에서 정부와 기금운용위원회는 보유 한도를 최대 24.9%까지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1,800조의 거인이 움직일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 놓였다.
수탁자의 배신, 그리고 원칙의 붕괴
역사는 ‘대리인’이 ‘주인’의 자리를 잠식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기록해왔다.
1720년 영국을 뒤흔든 남해회사 버블(South Sea Bubble)은 수탁자의 이탈이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준 최초의 근대적 사례다.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의 국채를 인수하고 주주들의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정치 권력과 결탁한 경영진은 주주의 이익보다 내부자의 이해관계를 따랐고, 주가는 1720년 1월 128파운드에서 8월 1,050파운드까지 치솟은 뒤 연말 124파운드로 붕괴했다. 손실은 고스란히 주인인 투자자들이 감당했다.
1980년대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위기도 같은 패턴이다. 규제 완화 이후 조합들은 예금자의 자산을 고위험 부동산에 투자했고, 1,000개 이상의 기관이 파산하며 납세자가 약 1,320억 달러를 떠안았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 FDIC, 1997) 원칙 이탈은 언제나 ‘시장 상황’이라는 논리로 포장됐다.
국민연금의 보유 한도 상향이 ‘시장 안정’이라는 논리로 추진되는 지금, 역사는 그 포장지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다시 묻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한비자가 본 수탁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7장에서 권력 유지의 핵심이 두려움과 신뢰의 균형에 있다고 봤다.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인간은 두려운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해치는 데 덜 망설이기 때문이다.”
—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군주론(Il Principe)』, 1513, 제17장
원칙대로 주식을 매도해 시장을 냉각시키는 수탁자는 시장 참여자들에게 기피 대상이자 ‘두려운 존재’다. 반면 시장 안정을 이유로 한도를 늘려주는 수탁자는 당장 환호받는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언어로 보면, 사랑받기 위해 원칙을 꺾는 순간 수탁자는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국민연금의 한도 상향이 시장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 이유가, 마키아벨리의 언어로는 경고 신호로 읽힐 수 있다.
한비자는 2,300년 전 『한비자』에서 원칙의 일관성이 신뢰의 근거임을 이렇게 정리했다.
“法莫如一而固,使民知之。(법은 하나이고 굳건해야 하며, 백성이 이를 알게 해야 한다.)”
— 한비자(韓非子), 『한비자』 「오두(五蠹)」편, 기원전 3세기
상황에 따라 규칙이 바뀌는 순간, 규칙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국민연금의 한도 조정이 ‘예외’로 시작해 ‘관행’이 될 때, 한비자가 경고한 바로 그 붕괴가 조용히 시작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고래의 딜레마, 패턴으로 읽다
국민연금의 문제는 단순한 자산운용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인가’라는 권력 구조의 문제다.
법적으로 국민연금의 주인은 가입자와 수급자, 즉 국민이다. 정부와 기금운용위원회는 수탁자다. 그러나 2026년 5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도 조정 과정을 보면, 의사결정의 중심에 ‘주인의 장기 이익’이 있는지, ‘시장 안정’이라는 단기 논리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코스피가 7,844포인트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국내주식 수익률이 연간 82.4%에 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성공이 새로운 구조적 한계를 만들었다. 국민연금이 국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 팔면 시장이 흔들리고 사면 과열되는 고래 효과(Whale Effect)가 심화된 것이다.
2027~2031년 중기자산배분안(2026년 5월 28일 확정 예정)이 국내주식 비중을 기존 축소 기조에서 확대 기조로 선회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이 딜레마의 해법이 원칙의 고수가 아닌 ‘규칙의 변경’으로 기울고 있음을 시사한다.
수탁자가 원칙보다 시장을 선택하는 패턴은 역사에서 반복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주인이 감당했다.
바라보는 자의 질문
1,800조 원이라는 숫자는 성공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이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자는 이 숫자 안에서 다른 것을 읽는다. 규모가 커질수록 원칙을 지키는 비용도 커진다. 원칙을 지키는 비용이 커질수록, 예외를 허용하는 논리도 강해진다. 그 논리가 반복될 때, 수탁자는 조용히 주인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국민연금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은, 법조문 안에 있는가. 아니면 실제 의사결정 구조 안에 있는가.
멀리서 바라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1,800조 원의 성공 뒤에서, 바라보는 자는 수탁자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 참고할 말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고린도전서 4:2
¹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2026년 2월 말 기준 기금운용 현황」. 국내주식 보유액 약 395조 원, 전체 자산 대비 비중 약 24% 이상. (nps.or.kr)
² 매일경제, 「국민연금, 국내주식 보유 한도 24.9%로 상향 추진」, 2026년 5월. 기존 목표 비중 14.9%, 한도 상향 5%p 유력. (mk.co.kr)
³ 한국거래소(KRX), 코스피 지수 통계. 2026년 5월 사상 최고치 7,844포인트 경신, 7,780~7,870선 횡보. (krx.co.kr)
⁴ 국민연금공단, 「2025년 국민연금 기금운용 연간보고서」. 2025년 국내주식 연간 수익률 82.4%. (nps.or.kr)
⁵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2027~2031 중기자산배분안」, 2026년 5월 28일 확정 예정. 국내주식 확대 기조 4개 안 논의 중.
⁶ Neal, Larry, The Rise of Financial Capitalism: International Capital Markets in the Age of Reas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남해회사 버블 주가 추이 및 붕괴 경위.
⁷ 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FDIC), History of the Eighties — Lessons for the Future, 1997. S&L 위기 파산 기관 수 및 납세자 부담액 약 1,320억 달러.
⁸ Niccolò Machiavelli, Il Principe, 1513, Cap. XVII.
⁹ 한비자(韓非子), 『한비자』 「오두(五蠹)」편, 기원전 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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