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는 왕의 것, 겨울은 백성의 것
대무신왕 부여 원정과 지워진 이름들
2026년 5월 · 역사 — 한국사 · Watchman
왕의 이름은 남고, 군인의 이름은 사라진다
서기 22년, 고구려 3대 왕 무휼(無恤)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목표는 부여. 당시 부여는 고구려보다 훨씬 인구가 많고 농경지가 넓은 대국이었다. 《삼국사기》는 이 원정을 간결하게 기록한다. 고구려군은 부여왕 대소(帶素)의 목을 베었고, 대소의 군대는 무너졌으며, 왕은 개선했다.
그런데 같은 기록의 다른 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다.”
대소의 목은 잘렸지만, 고구려군은 부여의 반격에 수렁에 빠졌다.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전쟁. 왕의 묘호는 대무신왕(大武神王) — ‘위대한 전쟁의 신’ — 으로 남겨졌지만, 그 전쟁의 수렁 속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이름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다.
왕의 이름은 역사가 되고, 군인의 죽음은 통계가 된다. 이 비대칭은 서기 22년의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 전쟁의 신이 치른 전쟁의 실제
대무신왕의 부여 원정은 흔히 ‘대승’으로 묘사되지만,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고구려는 부여왕 대소를 전사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완전한 멸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여군의 거센 반격에 고구려군은 진흙 수렁에 발이 묶였고, 상당한 군사와 군수물자를 잃은 채 후퇴해야 했다. 이것은 적국을 무너뜨린 정복이 아니라, 수뇌부를 타격해 부여를 내부 분열로 몰아넣은 전략적 타격에 가까웠다. 대소 사후 부여는 곧 분열되었고, 대소의 사촌 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대무신왕은 이들을 연나부(掾那部)에 편입시켰다.
이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특징은 인재 등용의 파격이었다. 원정 과정에서 대무신왕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자를 흡수했다. 북명 출신의 거구 괴유(怪由)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대소왕의 목을 벤 공로로 고구려 핵심 장수가 되었다. 《삼국사기》가 ‘신비로운 설화’로 포장한 이 장면 뒤에는, 중앙 귀족 체계 밖에 있던 지방 무사 집단을 왕권 아래 흡수하려는 냉정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를 보면 이 구조가 낯설지 않다.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이 붕괴하고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A.D. 8~23년)가 흔들리던 시기였다. 왕망의 개혁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적미군(赤眉軍)의 반란이 중원을 뒤흔들었다. 한반도 북쪽에서 고구려가 부여를 치던 그 해, 중국 대륙에서는 한 왕조를 무너뜨린 신나라마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1 동아시아 전체가 구질서의 붕괴와 새 질서의 탄생 사이에서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2. 불 없이 밥 짓는 솥 — 군인들의 배고픔
기록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전쟁의 실제 무게가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 있다.
《삼국사기》는 원정 중 이런 장면을 전한다. 비류수(沸流水) 가에서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나타났고,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열이 나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 부정(負鼎)씨라는 인물이 이 솥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신화적 외피를 벗겨내면 이 장면은 전쟁터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불을 피우면 연기로 위치가 노출된다. 적지를 행군하는 군대에게 밥을 짓는 것은 생존을 거는 행위였다. 노출 위험 없이 열을 낼 수 있는 철기 기술을 가진 지방의 기술자 집단이 합류함으로써, 군대는 비로소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 기록의 실제 의미로 읽힌다.
이 문제는 1,928년 뒤 같은 한반도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1950년 11월, 장진호(長津湖).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병력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보급선이 끊긴 상황에서 병사들은 얼어붙은 전투식량을 체온으로 녹여 먹었고, 동상으로 손발을 잃은 병사가 총탄에 쓰러진 병사만큼이나 많았다. 장진호 전투의 사상자 중 상당수는 전투가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으로 발생했다.2 서기 22년 고구려 군인들이 불 없이 밥 짓는 솥을 기적이라 여겼던 그 문제가, 현대식 무기를 든 군대에게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같은 세기 로마 제국에서도 군량 문제는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 3개 군단이 전멸한 원인 중 하나는 지형 불리와 함께 늘어진 보급선이었다.3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교착 원인 중 하나로도 보급 차량의 연료 부족이 분석되었다. 아무리 강한 군대도 굶으면 무너진다 — 이 사실은 서기 22년부터 2022년까지, 같은 방식으로 증명되고 있다.
3. “내 잘못이다” — 유가족의 슬픔과 왕의 사죄
원정에서 돌아온 대무신왕은 이례적인 행동을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짧지만 무겁다. “나라를 멸망시키지도 못하고 군사와 물자만 잃었으니 나의 잘못이다.” 왕은 직접 전사자들을 조문하고, 부상자들을 찾아다녔다.
이 장면을 미시사(微視史)의 눈으로 보면, 전쟁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무게가 보인다. 초기 고구려의 전쟁은 마을 단위로 장정들을 동원하는 구조였다. 전선에서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가족들의 원망은 왕권을 흔들 정도로 깊었을 것이다. 왕이 직접 유가족을 찾아가 사죄했다는 기록은, 그 원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같은 세기 서쪽에서는 이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폭발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사망하자, 라인강과 다뉴브강 방어선에 주둔하던 로마 군단들이 동시다발로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전역 약속 이행, 봉급 인상, 혹독한 군기 완화. 군인들은 전쟁의 도구였지만, 참을 수 있는 한계 앞에서는 목소리를 냈다.4
한국은 이 질문을 두 번 반복했다.
첫 번째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였다. 연인원 32만 명이 베트남으로 떠났다. 이들이 받은 전투 수당과 파월 기술자들의 달러 송금은 당시 한국 외환 보유액의 상당 부분을 채웠고,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 육성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분석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남아 있다.5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성장의 토대 중 일부는, 정글에서 총을 들었던 사람들의 몸값으로 쌓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국가는 환영 대신 침묵을 건넸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몸이 무너진 참전 용사들이 국가 인정을 요구하며 싸운 시간은 수십 년이었다. 경제의 거름이 된 희생에 대해, “내 잘못이다”라는 말은 끝내 공식적으로 오지 않았다.6
두 번째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였다.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 장병 약 1만 9천 명은 국가의 결정으로 전장에 갔고, 국가의 명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귀환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각종 건강 문제를 호소한 병사들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 지원은 오랫동안 미흡했다. 일부는 진단 자체를 거부당했고, 일부는 전역 후 아무런 연결망 없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7
대무신왕은 전쟁에서 돌아온 직후 직접 유가족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서기 22년의 왕이 한 일을, 20세기와 21세기의 국가는 하지 않았다. 그 공백이 얼마나 긴지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나이로 가늠할 수 있다.
4. 전쟁 영웅과 수탈의 얼굴 — 권력을 쥔 자들
대무신왕 15년(A.D. 32년), 《삼국사기》에 짧은 기록이 등장한다. “백성들이 원망하는 구도(仇都) 등 세 사람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구도는 부여 정벌 이후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쥔 뒤, 그는 지방 백성들의 토지와 재물을 수탈했다. 대소왕의 위협에서 벗어나 북방이 안정되자, 이번에는 내부 지배층의 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도 백성의 고달픔은 끝나지 않는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의 착취자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 구조는 동시대 세계사에서도 반복된다. 중국에서 전한이 붕괴한 원인 중 하나는 공신 귀족들의 토지 겸병이었다. 왕망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후한(後漢, A.D. 25년)이 세워진 뒤에도 호족들의 지방 지배는 계속되었다. 제국이 안정될수록 공신은 귀족이 되고, 귀족은 지방의 왕이 된다.
성경 속에도 같은 패턴이 있다.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하자, 사무엘은 경고한다. “왕이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고…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사무엘상 8:11~14) 전쟁의 영웅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 예언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패턴은 현대 한국에서도 선명하게 반복되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국가는 공적 자금 약 168조 원을 투입해 부실 금융기관과 대기업을 살렸다.8 위기가 수습된 뒤, 살아남은 대기업들은 계열사를 오히려 확장했고, 중소 하청 단가는 낮아졌으며,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해야 했다. 구도가 전쟁 영웅의 자리에서 수탈자로 변신한 속도와, 공적 자금으로 살아난 기업이 내부 이익 구조를 강화하는 속도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2020년 코로나19 재난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소상공인 지원금이 집행되는 동안 일부 건물주들의 임대료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올랐다. 국가가 재난의 충격을 흡수하는 사이, 그 혜택의 상당 부분은 임대 수익으로 흘러들어갔다.9 외부의 위기가 지나가면 내부의 수탈이 재개된다 — 서기 32년 고구려에서 확인된 이 논리는, 대한민국의 1997년과 2020년에도 같은 방향으로 작동했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
대무신왕의 부여 원정은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을 피우지 못해 굶주리던 군인들, 아들과 남편을 잃고 왕의 사죄를 받아야 했던 유가족들, 그리고 전쟁 영웅이 된 자들의 수탈에 신음하던 평민들이 있었다.
역사는 왕의 묘호를 남긴다. 대무신(大武神) — 위대한 전쟁의 신. 그러나 전쟁의 신이 치른 전쟁을 실제로 감당한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장진호의 동상 환자도,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 홀로 싸운 병사도, IMF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가장도 — 기록은 승리를 남기고, 기억은 고통을 지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위기 극복’이라고 부르는 것 뒤에는, 어떤 이름들이 지워지고 있는가.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고대 한반도의 채무 노예제와 세계사의 공통 문법을 살펴보았다. → 빚이 사람을 삼킬 때
* 참고할 말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굶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밭의 소산이 없어 굶주려 쇠약하여 감이니라’ — 예레미야애가 4:9
각주 및 출처
1. 《삼국사기》(김부식 저, 1145년) — 대무신왕 본기; 《후한서(後漢書)》 — 왕망·적미군 관련 기술
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5권, 2008 — 장진호 전투 기록; Russ, Martin, Breakout: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Korea 1950, Penguin Books, 1999
3. Cassius Dio, Roman History, Book LVI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기록
4. Tacitus, Annales, Book I — 아우구스투스 사후 라인강·다뉴브 군단 반란 기록
5.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레출판, 2015 — 파월 외화 수입 및 경제적 기여 분석; KDI, 《한국 경제 60년사》, 2010
6. 국가보훈처, 《월남전 참전유공자 고엽제 후유증 실태조사》, 2005; 연합뉴스, “고엽제 피해 40년, 여전히 진행 중”, 2013년 4월
7. 국가보훈처, 《이라크 파병 장병 건강실태 조사 보고서》, 2010; 연합뉴스, “이라크 파병 용사들의 귀환 후 삶”, 2013년 12월
8. 금융감독원, 《공적자금 투입 및 회수 현황》, 2022; KDI, 《외환위기 10년의 평가》, 2007
9. 한국부동산원,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 조사》, 2020~2021;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실태조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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