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지 않는 강물

흐르지 않는 강물

역사는 스스로 움직인다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역사가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말했다.


숫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2026년 4월, 국가데이터처가 청년 고용률 통계를 발표했다.

2024년 5월부터 시작된 청년 고용률 하락이 24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멈추지 않는다.

이 숫자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은 이 장면을 이미 한 번 지나쳤다. 2005년 9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51개월 연속 하락. 그것이 지금까지 역대 1위 기록이다. 현재의 24개월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절반이 이미 경고음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숫자는 사건이 아니다. 숫자는 역사의 구조가 대화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멈춘 것들이 역사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역사는 비슷한 장면을 기억한다.

1873년 5월, 빈 증권거래소 붕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장기 경제 침체에 접어들었다. 노동자 계층의 고용이 무너지는 동안, 제국의 관료 구조와 귀족 기득권은 자기 보존의 논리로 움직였다. 노동 구조의 개혁은 논의되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중심부가 자신을 보호하는 속도가, 변방이 식어가는 속도보다 빨랐다. 제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1918년이었지만, 그 균열은 이미 1870년대에 새겨지고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의 파고가 독일을 덮쳤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의 청년 실업은 구조적 위기로 전환되었다. 정부는 분열되었고, 노조와 대자본은 각자의 이해를 지키는 데 집중했으며, 일자리를 갖지 못한 청년 세대는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일자리를 잃은 세대는 반드시 어딘가로 향한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는, 그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을 먼저 보여주었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의 현재를 이 역사적 장면들과 직접 등치시키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나 패턴의 유사성을 외면하는 것도 또 다른 종류의 부주의다.


철학이 묻는 것 — 흐름과 멈춤 사이에서

헤겔(Hegel)은 역사를 이성(理性)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읽었다. 모순이 충돌하고, 그 충돌이 새로운 단계를 만들며, 역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것을 ‘지양(止揚, Aufheben)’이라 불렀다. 낡은 것을 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가능성은 살리면서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는 운동.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해 무언가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다. 지양이 일어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모순이 충돌하지 않고 억눌릴 때, 변화해야 할 구조가 자기 보존의 힘으로 고착될 때 — 역사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역사는 기다리지 않는다. 구조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역사는 다른 방식으로 그 구조를 해소한다. 그 방식이 언제나 온화한 것은 아니었다.

노자(老子)는 다른 언어로 같은 긴장을 포착했다.

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

(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배운다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요, 도(道)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지거니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이윽고 무위(無爲)에 이른다. 무위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무위는 수동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 강물이 스스로 낮은 곳으로 향하듯 사물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이 언어를 빌려 방치를 정당화할 때, 그것은 노자가 경계한 가장 위험한 형태의 무위다. 흘러야 할 것을 막아두고, 막아둔 것을 자연이라 부르는 것.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구조,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막혀 있는 구조, 노조 중심의 내부자 보호가 청년 외부자를 배제하는 구조 — 이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흐름인가, 아니면 인위적으로 고착된 정체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무위는 도(道)가 아니라 방치의 다른 이름이 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것들이 쌓일 때

청년 고용률 하락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요인들은 많다. 인구 구조의 변화, 경직된 노동시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구조적 격차, 기득권 중심의 고용 보호 체계.

이 요인들 중 어느 것도 단독으로 문제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동시에 작동할 때 만들어지는 패턴은 뚜렷하다. 이익을 잃을 집단은 조직되어 있고, 이익을 얻어야 할 집단은 조직되어 있지 않다. 아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청년들은 협상 테이블 위에 없다.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청년 고용률 하락은 서로 다른 통계가 아니다. 일자리가 없으면 결혼을 미루고, 결혼을 미루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숫자들은 각자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문장을 함께 쓰고 있다. 이 나라의 청년들은 미래를 기획하기 어렵다는 문장을.

헤겔의 언어로 말하자면, 지금 한국의 노동 구조는 지양되지 않고 있다. 모순이 쌓이고 있다. 역사는 이 상태를 무한정 허용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자의 질문

24개월. 이 숫자가 51개월이 되기 전에 무언가 달라질 것인가.

흘러야 할 것이 흐르지 않을 때, 그것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역사는 그 방식이 어떤 모습인지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흐름을 막고 있는가, 아니면 흐름 안에 있는가.
그리고 망루 위에서 먼지의 방향을 읽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 참고할 말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내리라.” — 이사야 43:19

* 참고 문헌: 헤겔, 『역사철학강의』 / 노자, 『도덕경』 48장 / 국가데이터처, 청년고용률 동향 (2026.04) / KDI, 청년고용 구조 분석 보고서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