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의 인사

폭풍 전야의 인사 — 서기 27년, 고구려는 무엇을 준비했는가

을두지 임명이 말해주는 것

2026년 5월 · 역사 — 한국사 · Watc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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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우리는 서기 26년 대무신왕의 개마국 병합과 그 전략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 개마고원의 겨울

전쟁에서 이긴 다음이 더 어렵다.

서기 26년, 대무신왕 무휼(無恤)은 개마국(蓋馬國)을 병합하고 구다국(句茶國)의 자진 항복을 받아냈다. 《삼국사기》 기준으로 그것은 전격전이었다. 10월에 친정을 시작해 적국의 왕을 죽이고, 12월에는 이웃 나라가 스스로 문을 열었다. 불과 두 달 만에 한반도 북부의 판도가 재편되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그 다음 해 정월에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또 다른 정복 군장을 꾸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사(人事)였다.

서기 27년 정월, 대무신왕은 우보(右輔)였던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승진시켰다. 좌보는 고구려 최고 관직이었다. 탐욕스럽다고 평가받던 구도(仇都)를 밀어내고 지혜로운 인물을 조정의 정상에 올려놓은 것이다. 정복 사업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부 체제를 재정비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바깥이 넓어지면 안이 먼저 무너진다. 대무신왕은 영토의 확장보다 무서운 것이 내부의 균열임을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간, 다른 무대

고구려가 조정을 정비하던 서기 27년, 지구 반대편에서도 거대한 전환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가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으로 영구 은둔했다. 표면적으로는 원로원과의 불화였지만,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더 내밀한 사유를 전한다. 어머니 리비아(Livia)가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오래된 편지들 — 티베리우스의 완고하고 가혹한 성격을 비판한 — 을 꺼내 아들에게 들이댄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아들 드루수스의 죽음(서기 23년) 이후 깊어진 염세와 권력 혐오가 그 결심을 굳혔다. 황제가 정치의 중심에서 스스로 물러서자 그 공백을 근위대장 세야누스(Sejanus)의 사욕이 채우기 시작했다. 외부 팽창이 멈춘 자리에 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독소가 스며든 것이다. 이 구조는 고구려에도, 로마에도, 오늘날의 어떤 조직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유대 속주에서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가 총독으로 부임한 지 1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훗날 세계사를 뒤흔들 사건의 배경이 될 그 변방에서, 로마의 행정 체계는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성전 제사장 세력, 로마 총독, 헤롯 분봉왕이라는 세 개의 비타협적 권력이 하나의 작은 땅에서 충돌하며 폭발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후한(後漢) 광무제 유수(劉秀)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제국을 재건한 지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급진적 이념 과잉으로 무너진 뒤, 광무제는 철저히 실용적인 관료 체계를 구축했다. 공신들의 발언권을 누르는 대신 실무 능력을 갖춘 인재를 중용하고, 지방 호족을 중앙 제도 안으로 흡수했다. 이 안정화 전략은 이후 2세기 동안 동아시아 질서의 기준점이 되었다.

고구려 바로 인근,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신라의 선도 세력들이 아직 분립된 소국 체제 속에서 유리 이사금 4년을 맞고 있었고, 백제는 다루왕(多婁王) 재위기로 남쪽 마한 세력과의 팽팽한 긴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기 27년은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질서를 쓰는 시간이었다. 그 거대한 격동의 한복판에서 고구려는, 다음 전쟁이 아니라 내치(內治)로 다가올 폭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을두지라는 선택

을두지가 어떤 인물인지는 《삼국사기》에 직접적인 묘사가 많지 않다. 기록은 그를 “지혜롭다”고 간결하게 평할 뿐이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이 인물을 조정의 정상에 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기 22년 10월, 대무신왕의 핵심 무장 괴유(怪由)가 세상을 떠났다. 부여 원정에서 대소왕의 목을 벤 그 인물이었다. 핵심 장수를 잃은 공백 속에서 대무신왕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무장이 아니었다. 정복으로 비대해진 영토를 안정시키고, 새로 편입된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이며, 언제든 닥쳐올 강대국의 압박을 버텨낼 — 칼이 아닌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

반면 밀려난 구도(仇都)의 문제는 탐욕이었다. 탐욕스러운 관료는 시스템을 갉아먹는다. 전쟁 직후 편입된 새 영토의 백성들에게 가혹한 수탈이 가해지면, 어렵게 포섭한 민심은 순식간에 흩어지기 마련이다. 대무신왕은 승리의 아집에 빠지지 않고 조정 상층부의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정확히 1년 뒤, 후한 요동태수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증명된다. 을두지가 그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는지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이 대비는 오늘날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풍경을 돌아보게 만든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인적 쇄신”과 “통합”은 단골 구호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요직을 채우는 면면을 보면, 구도의 탐욕을 가진 이들이 을두지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욕을 품은 사람이 자리를 망친다. 이 자명한 원칙이 왜 지금도 이토록 실현되기 어려운가.

한국 현대사에서 이 질문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기획원에 김정렴, 오원철 같은 테크노크라트를 전면에 배치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재익을 청와대 경제수석에 앉히고 물가 안정과 개방 정책을 맡겼다. 충성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삼은 인사였고, 그 결과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 분야만큼은 을두지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 인사의 정합성은 경제 분야에만 선택적으로 작동했다는 한계를 배제하기 어렵다. 정치·사법·언론 영역에서는 여전히 충성도 중심의 구도형 인사가 병존했고,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군과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을두지는 경제 부서에만 앉아 있었고, 나머지 자리는 구도가 채웠다 — 이렇게 읽힐 수 있다. 그 불균형이 남긴 구조적 유산은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투톱 체제 — 을두지와 송옥구

서기 27년의 인사 정비는 을두지 단독이 아니었다.

을두지가 좌보에 오르면서, 우보(右輔)에는 송옥구(松屋句)가 임명되었다. 고구려 조정의 투톱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좌보는 내정 관리와 민생을, 우보는 군사와 외교를 분담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해석이다. 이 체제는 단순한 보직 배치를 넘어선, 권력 구조의 설계였다.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Consul) 제도와 닮아 있다. 두 명의 집정관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해 1인 독재를 막고 상호 견제를 제도화했던 로마는, 카이사르가 이 체제를 무너뜨리고 종신 독재관이 되면서 공화정의 종말을 맞이했다. 견제 없는 권력의 집중은 단기적 효율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는다.

대무신왕은 정복 전쟁으로 강화된 왕권을 스스로 제도적 틀 안에 묶어두었다. 승리에 취한 군주가 흔히 빠지는 독단의 함정을 정확히 피해 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5년 단임 대통령제 하에서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권력이 특정 핵심으로 집중되고, 내각이 대통령의 참모 조직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되풀이된다. 시스템에 의한 견제가 없는 승리는, 언제나 다음 패배를 예약하는 것과 같다.


다윗의 통치 정비 — 성경 속의 같은 장면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구조를 찾으면, 다윗 왕의 통치 말기가 겹쳐 보인다.

다윗이 블레셋을 제압하고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가장 먼저 착수한 것도 행정 체계의 정비였다.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이 세운 관료 명단을 기록한다. 요압(군대 장관), 여호사밧(사관), 사독과 아히멜렉(제사장), 스라야(서기관), 브나야(친위대장) — 각 기능별로 책임자를 세우고 권한을 분산했다.

그러나 이 견고해 보이던 체제가 흔들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었다. 압살롬이 성문에 앉아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으며 “내가 이 땅의 재판관이 되어 공정하게 판결해주었으면 좋겠다”라며 민심을 훔치자, 이스라엘의 마음이 순식간에 다윗에게서 떠났다(사무엘하 15:1~6). 외부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했을지라도, 백성들의 일상을 돌보는 내정이 무너졌을 때 권력은 뿌리째 흔들린다.

대무신왕이 개마국 병합 직후 군사들의 약탈을 엄금하고 곧바로 내치 정비에 들어간 것은, 다윗이 말년에 겪었던 그 실패의 경로를 밟지 않으려는 통치의 직관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반복된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반복된다.

철학은 모든 복잡한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만능 원리로 환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왜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그 근원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승리 뒤에 찾아오는 교만, 권력의 비대화가 부르는 맹점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넘기 힘든 거대한 중력이다. 대무신왕의 인사는 그 중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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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서기 27년 정월, 을두지가 좌보에 임명될 때 개마고원의 백성들은 이미 고구려의 새로운 백성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삼국사기》는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는다. 세금의 무게가 가벼워졌는지, 군역의 의무가 새로이 지워졌는지, 기존 지역의 유력자들이 어떻게 흡수되었는지 — 모두 기록 너머의 침묵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언제나 결정권을 쥔 군주의 이름을 남기고, 그 결정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던 민초들의 이름은 지운다.

바라보는 자는 그 침묵 속에서도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탐욕스러운 구도가 아니라 지혜롭고 공명한 을두지가 조정의 정상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새로운 백성들은 수탈이 아닌 시스템의 보호를 경험했을 것이다. 내치의 질이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내치(內治)의 질이 외풍(外風)을 견디는 힘을 결정한다. 이 원칙은 서기 27년 고구려에서도, 지금 이 순간의 대한민국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조정 정상에는, 과연 을두지가 앉아 있는가.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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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 잠언 24:5~6


각주 및 출처

1.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0년(서기 27년) 정월 조 — 을두지 좌보 임명 (김부식, 1145년)

2. 《삼국사기》 권14,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10월 조 — 괴유 사망 기록

3. 《삼국사기》 권14, 대무신왕 9년(서기 26년) 조 — 개마국 병합 및 구다국 항복

4. 후한 광무제 관료 체계 정비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 본기 (범엽, 5세기)

5. 티베리우스 카프리 은둔 사유 — Suetonius, The Twelve Caesars: Tiberius; Tacitus, Annales, Book IV~VI

6. 본디오 빌라도 유대 총독 부임 —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7. 로마 집정관 제도 및 카이사르 독재관 — Suetonius, The Twelve Caesars: Caesar

8. 다윗 왕 행정 체계 정비 — 사무엘하 8장; 압살롬 반란 — 사무엘하 15:1~6 (개역개정)

9. 박정희 정권 테크노크라트 중용 — 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사, 1990;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06

10. 전두환 정권 김재익 경제수석 — 김재익 평전 관련 자료; 조선일보, “김재익, 전두환 시대의 을두지”, 2003년 10월

11. 잠언 24:5~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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