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환경 선박이라는 새 백사장
LNG·암모니아·수소 추진선의 시대
한국 조선해양 시리즈 08편 · 바다 · 2026.07.05
백사장은 다시 비어 있다
1972년 3월,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주영이 가진 것은 백사장 사진 한 장과 오백 원권 지폐, 그리고 아직 짓지도 않은 조선소의 설계도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빈 땅을 보고 “저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그렇게 세워진 조선소를 향해 중국이라는 추격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백사장이 열리고 있다. 이번엔 땅이 아니라 연료의 영역이다. LNG·암모니아·수소로 배를 움직이는 친환경 기술 지형에는 아직 아무도 깃발을 꽂지 못했을지 모른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3년 개정된 온실가스 감축 전략에서 국제 해운 부문의 탄소 배출을 2050년 전후로 사실상 ‘넷제로’에 이르게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유럽연합은 2025년부터 FuelEU Maritime 규정을 통해 선박 연료의 온실가스 집약도를 단계적으로 낮추도록 강제하기 시작했다.
규제는 이미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규제를 만족시킬 ‘표준 연료’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규제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기술 표준 사이의 간극 — 화주와 선주들은 바로 이 불확실한 틈새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미확정의 공백이, 1972년의 백사장과 같은 자리다.
증기선이 돛을 이겼을 때
연료의 전환이 산업의 순서를 다시 쓴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838년 4월,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이 설계한 증기선 그레이트 웨스턴(Great Western)호가 대서양을 건넜다. 그전까지 대서양 항로는 범선의 영역이었다. 증기기관은 무겁고, 석탄은 비쌌고, 항속거리는 짧았다. 대부분의 조선업자들은 증기선을 연안 항해용 보조 수단 정도로만 여겼다.
당시에도 확신은 없었다. 범선이 여전히 더 빠른 구간이 있었고, 증기기관의 신뢰성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루넬을 비롯한 소수의 기술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바람이 아니라 기계가 배를 움직이는 세상에서는, 항로와 시간표와 무역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불확실성을 먼저 통과한 나라가 이후 백 년간 해운의 패권을 쥐었다.
한국 조선업의 수주 잔량은 이미 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다.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의 도크(dock)는 최근 수년간 LNG 이중연료 추진선과 메탄올 추진선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머스크(Maersk)가 메탄올 추진 대형 컨테이너선을 한국 조선소에 잇달아 발주한 배경에는, 화주들이 ‘다음 연료’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암모니아 추진 엔진은 아직 상용화 초기 단계이며, 수소 연료전지 추진은 저장 밀도의 한계로 대형 원양 선박보다는 근해 소형선에서 먼저 시도되고 있다. 어느 것이 최종 승자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비어 있음의 쓸모, 그리고 시대를 앞서 읽는 자
노자는 수레바퀴의 비유로 ‘없음(無)’의 쓰임을 설명했다.
三十輻共一轂,當其無,有車之用。
(삼십복공일곡,당기무,유거지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니, [바퀴통 가운데의] 비어 있음에 의존하여 수레의 쓸모가 생겨난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11장
친환경 추진 기술의 지형이 아직 비어 있다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조건으로 읽힐 수 있다. 표준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표준을 누군가 아직 세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헤겔은 특정한 시대마다 그 흐름을 먼저 감지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인물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불렀다. 다만 헤겔이 바라본 세계사적 개인은 미래를 의도적으로 설계한 영웅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열정과 사익을 좇아 움직였을 뿐이나, 그 행동의 결과가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nft)’를 거쳐 시대정신의 실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헤겔의 핵심 분석일 수 있다.1 이 관점에서 보면, 증기선을 먼저 알아본 브루넬도, 백사장에서 조선소를 본 정주영도 새로운 시대를 의도적으로 창조했다기보다, 이미 태동하고 있던 시대의 요구에 자신을 던진 결과 역사의 도구가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 백사장을 알아보는 눈
노자가 말한 ‘비어 있음의 쓸모’와 헤겔이 말한 ‘시대를 먼저 읽는 눈’은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공백은 관찰자에 따라 위협으로도, 기회로도 읽힌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것은 공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눈이다.
한국 조선업이 직면한 현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중국이 압도적인 규모와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가공할 속도로 추격해오는 구도 속에서, 한국이 쥘 수 있는 실효성 있는 패는 ‘더 싸게’ 짓는 경쟁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표준을 세우지 못한 자리’를 먼저 점유하는 것일 수 있다. 암모니아 연료의 독성 처리 기술, 수소 저장 밀도의 돌파, 탄소 집약도 규제를 만족시키는 이중연료 엔진의 표준화 — 이 중 어느 것을 한국이 먼저 규칙으로 세우느냐가, 다음 세대의 해운 지형을 결정할 변수로 읽힐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연료
1972년의 백사장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비어 있는 모래밭이었다. 이름은 그 위에 조선소가 세워진 뒤에야 붙여졌다.
지금 친환경 추진 기술의 지형에도 아직 이름이 없다. LNG인지, 암모니아인지, 수소인지, 혹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또 다른 무엇인지 — 그 답은 미래가 결정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은 비교적 뚜렷해 보인다. 새로운 연료의 이름을 먼저 정의하는 주체가 다음 백 년의 글로벌 항로를 설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 참고할 말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내며 사막에 강들을 내리라’ — 이사야 43:19
주1. G.W.F. 헤겔, 『역사철학강의』.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weltgeschichtliche Individuen)’과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nft)’ 개념. (국내 표준 번역본·판본·쪽수는 확인 후 명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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