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시대

균열의 시대 — 미중 대결과 패권의 미래

균열의 시대 — 미중 대결과 패권의 미래

세계사-제국-⑧ · 1991~2026, 서른다섯 해 동안 이어진 패권의 재편

세계사


파리의 회담장, 부산의 악수

2026년 3월 15일, 파리의 OECD 본부에 미국과 중국의 대표단이 마주 앉았다. 미국 측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했고, 중국 측에서는 허리펑 국무원 부총리가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틀에 걸쳐 관세와 희토류, 첨단기술 수출 통제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이 회담은 몇 달 전인 2025년 10월 부산에서 열린 미중정상회담의 후속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나라는 무역휴전에 합의했다. 미국은 펜타닐 관련 제품 관세를 20%에서 10%로 낮췄고, 중국은 희토류 수출 규제를 1년간 유예했다.

그런데 이 휴전은 평화가 아니었다. JP모건이 추산하고 국제금융센터(KCIF)가 인용한 수치에 따르면, 합의 이후에도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약 41%, 중국의 대미 실효관세율은 28%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국립외교원은 2026년 국제정세전망에서 미중 관계를 “전면적 충돌이 아닌 관리되는 경쟁”으로 규정했다.

싸우지 않되 화해하지도 않는 상태, 무너지지 않되 봉합되지도 않는 상태. 이 어정쩡한 균형이 지금 세계 질서의 가장 정확한 초상일 것이다. 35년 전, 세계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극의 순간에서 균열의 시대로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 해체됐다. 냉전을 지탱하던 양대 축의 균형이 깨지자, 소련 해체 과정을 지켜보던 1990년 말, 외교 평론가 찰스 크라우해머는 이 시기를 ‘단극의 순간(unipolar moment)’이라 명명했다.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적 영향력 어느 것 하나 미국에 대적할 나라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단극의 순간은 시작부터 자기 균열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2001년 12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미국은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되어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 기대와 다른 길을 걸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중국은 4조 위안 규모의 경기부양책으로 세계 경제 회복을 견인했고, 이때부터 ‘G2’라는 표현이 국제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균열은 2018년 7월 6일, 관세로 표면화됐다. 미국이 34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25% 보복관세를 부과하며 무역전쟁이 시작됐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이 갈등의 구조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이는 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을 위협할 때, 양측의 의사와 무관하게 충돌로 치닫는 역사적 패턴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계는 미국·유럽 중심의 진영과 러시아·중국이 가까워지는 진영으로 다시 나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은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을 전면 통제했다. 무역전쟁이 기술전쟁으로, 다시 안보 문제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025년 2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전방위 상호관세를 발효시키며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35년 전 소련의 해체로 열렸던 단극의 시대는, 결국 또 하나의 초강대국이 그 자리를 채워가는 균열의 시대로 이어졌다.

함정과 세력 — 동서양이 함께 읽는 패권의 문법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든 진짜 원인은 아테네의 세력 성장과, 그것이 스파르타에게 안긴 두려움이었다는 것이다. 2,40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자주 인용되는 틀이 되어 있다.

동양에도 같은 문법을 다루는 사상가가 있었다. 전국시대 법가 사상가 한비자는 본래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내치(內治)의 논리로서 ‘세(勢)’, 곧 힘의 크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군주의 통치 기반으로 세운 이 힘의 논리는 국제 질서에도 그대로 대입된다.

力多則人朝,力寡則朝於人。(역다즉인조,역과즉조어인。)
“힘이 많으면 남이 찾아와 조공하고, 힘이 적으면 남에게 가서 조공한다.” — 한비자(韓非子), 『한비자』 「현학편(顯學篇)」

한비자에게 국제질서란 명분이 아니라 세력 균형의 문제였다. 지금의 관세 전쟁과 수출통제, 희토류를 둘러싼 협상 역시 이러한 냉정한 힘의 계산 위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서양의 마키아벨리 역시 비슷한 결을 공유한다. 그가 『군주론』에서 말한 두려움은 본래 군주와 백성 사이의 관계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통치의 비결로 꼽은 “존경 대신 두려움을 심어주는 기술”은, 현대 미중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보다는 상호 두려움이 만들어낸 잠정적 균형으로 읽힐 수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전쟁 없는 함정 — 관리되는 경쟁이라는 새로운 패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항상 전쟁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다. 앨리슨의 연구는 지난 500년간 신흥 강국이 기존 강국을 위협한 16개 사례 중 4개는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보여준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경제 패권 경쟁이 대표적이다. 플라자 합의로 봉합된 그 갈등은 결국 총이 아니라 환율로 해소됐다.

지금의 미중 관계가 향하는 지점도 전면전이 아니라 이 ‘관리된 경쟁’에 가까워 보인다. 두 나라는 핵무기로 서로를 억지하고 있고, 반도체 공급망으로도 서로를 억지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 없이 희토류를 얻기 어렵고, 중국은 미국 없이 첨단 반도체 장비를 얻기 어렵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무기화된 상호의존(weaponized interdependence)’이라 부른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억지력을 넘어선 현상이다. 경제적 사슬로 묶인 ‘경제적 상호확증파멸’ 구조가 역설적으로 지금의 위태로운 평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일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지적했듯, 패권국의 몰락은 대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의 누적, 즉 ‘제국의 과잉 팽창’에서 비롯된다. 관세와 수출통제, 반도체 보조금과 군비 지출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지금의 미국, 그리고 부동산 위기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는 지금의 중국 모두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균열의 시대는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강대국이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선 균열의 자리

이 균열은 태평양 건너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국립외교원은 2026년 전망에서 미국이 첨단기술·전략산업을 중심으로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한국이 공급망 재편과 통상 규범 변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위치에 있다고 짚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설계한 달러 질서가 어떻게 원/달러 환율까지 흔드는지를 살펴보았다. (다투지 않고 얻은 자) 반도체 수출통제와 희토류 협상 역시 같은 구조 위에 있다. 규칙은 워싱턴과 베이징에서 정해지고, 그 규칙의 파장은 서울의 반도체 공장과 환율 시장까지 곧바로 전달된다.

한국은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와 중국의 희토류 공급망 사이, 그 균열의 정중앙에 서 있는 나라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기울 수도,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는 위치다. 특정 진영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이, 지금 이 자리에서 모색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 중 하나로 읽힐 수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언제나 전쟁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는가, 아니면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였는가. 35년 전 소련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균형이 들어섰듯, 지금의 균열 역시 또 다른 질서로 봉합될 것이다. 그 질서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 균열의 정중앙에 서 있는 이 나라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이 질문을 열어둔 채로 다음 장을 기다린다.


* 참고할 말씀: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 2:4


¹ 소련 해체: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최고회의 해체 선언
² Charles Krauthammer, “The Unipolar Moment,” Foreign Affairs, Vol. 69, No. 5 (Winter 1990/1991), pp. 23-33.
³ 중국 WTO 가입: 2001년 12월 11일
⁴ 리먼 브라더스 파산: 2008년 9월 15일
⁵ 미중 무역전쟁 개시 관세: 2018년 7월 6일, 340억 달러 규모 25% 관세
⁶ Graham Allison, 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 (New York: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7). (국역본: 그레이엄 앨리슨 저, 정혜윤 역, 『예정된 전쟁』, 세종서적, 2018)
⁷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2월 24일
⁸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2022년 10월
⁹ 트럼프 2기 상호관세 발효: 2025년 2월
⑩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⑪ 『韓非子』, 「顯學」: “力多則人朝, 力寡則朝於人。”
⑫ 마키아벨리, 『군주론』 제17장
⑬ 앨리슨의 16개 사례 연구: Destined for War (2017)
⑭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Random House, 1987). (국역본: 폴 케네디 저, 이일수 역, 『강대국의 흥망』, 정민사, 1990)
⑮ 국립외교원 IFANS, 『2026 국제정세전망』
⑯ 미중 실효관세율 추산: JP모건, 국제금융센터(KCIF)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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