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바다를 필요로 했을 때
1960~70년대, 왜 선원이 영웅이었나
외항선원 시리즈 1편 · 바다 · 2026.07.14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우러르던 자리
2024년 초, 국내 원양산업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력난을 논의했다. 논의의 핵심은 하나였다. 배를 탈 한국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서서히 쌓여온 균열의 결과다.
그런데 같은 나라, 불과 두 세대 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있었다. 원양어선을 타고 돌아온 선원은 마을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신랑감으로 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목돈을 쥐고 돌아와 논을 사고 집을 짓는 사람이 바로 그 배를 탔던 사람이었다. 같은 바다인데 그때는 영웅이었고 지금은 기피 대상이다. 무엇이 한 직업을 영웅으로 만들고, 무엇이 그 영예를 거두어 가는가.
여기서 짚어둘 것이 하나 있다. 화물선·컨테이너선을 타는 외항상선원과, 물고기를 잡으러 대양으로 나간 원양어선원은 해운업계에서 엄격히 구분되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외항선원’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이유는 명칭의 정밀함이 아니라, 두 자리 모두 국가가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육지를 떠나 대양에서 외화를 벌어들인 노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편은 그 뿌리, 원양어선원에서 시작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바다로 읽는 한국에서 한국 조선해양 100년의 패턴을 살펴보았다. 이번 편은 그 배를 지은 도크가 아니라, 그 배에 올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항로를 돌린다.
라스팔마스로 가는 배
이 항해의 배경에는 그보다 앞선 정책적 결단이 있었다. 1952년 1월 18일, 휴전선 부근에서 지루한 고지전이 이어지던 전쟁통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공표했다. 이른바 평화선, 해외에서는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이 경계선은 기술과 자본에서 크게 앞서 있던 일본 어선으로부터 한국 연안을 지키려는 방어선이었다.1 그러나 이 선언은 동시에 연안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과제도 함께 남겼다. 지킬 수 있는 바다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 너머는 결국 기술과 배로 열어야 했다.
그 과제를 감당할 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949년 3월, 정부는 미국 ECA 원조자금 32만 6천 달러를 들여 미국이 1946년에 건조한 230톤급 해양조사선 ‘워싱턴호’를 인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배에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를 건져 오라’는 뜻을 담아 지남호(指南號)라는 이름을 붙였다.2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선박을 운항할 기술과 경험을 가진 인력이 당시 국내에는 없었다. 지남호는 한동안 외자청 소속 해상순시선 겸 제주도 출장용으로, 전쟁 중에는 부산·제주·여수 간 의약품 수송선으로 쓰이며 정작 어선으로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쟁통에 이 배를 직접 관리하기 버거워진 정부는, 수산업 진출을 꿈꾸던 민간기업 제동산업에 1951년 9월 23만 9천 달러로 이를 불하했다. 불하 이후에도 곧바로 대양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연근해어업에 투입했으나 어구가 미비해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일본 수출용 활어운반선으로 돌려보려 했으나 수산물 수출금지 조치에 막혔다. 그렇게 6년을 돌고 돌아 1957년 6월 29일, 지남호는 마침내 부산항 1부두를 떠나 인도양으로 향했다. 108일의 항해 끝인 10월 4일, 10톤의 참치를 싣고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한국 원양어업의 효시로 기록된다.3 당시 태평양 다랑어 어장은 이미 미국과 일본이 장악한 바다였다. 후발국이 그 바다에 처음 발을 들인 역사적인 항해로 평가받는다.
본격적인 전환점은 1966년이었다. 그해 5월,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원양어선 강화 601호가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에 처음 입항하며 대서양 조업의 전진기지가 열렸다.4 이후 서아프리카 어장 개발과 정부 지원이 맞물리며 원양어선단이 빠르게 늘었고, 1970년대 말에는 이 지역에서 조업하는 한국 원양어선이 250여 척에 달했다. 같은 시기 라스팔마스 원양어업이 벌어들인 외화는 연간 약 2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파독 광부·간호사의 연간 송금액을 모두 합친 것의 열 배에 이르는 규모였다.5 현재가치로 환산된 정확한 통계는 드물지만, 이들이 국가 외화 획득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여러 기록에서 일관되게 확인된다. 실제로 당시 한 선원은 파독 광부나 간호사보다 앞서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들였다는 자부심을 증언하기도 했다.6
1960년대 중반 원양 연승어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선사들은 앞다투어 배를 늘렸고, 1970년대 초반 원양어선 척수는 정점에 이르렀다.7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세계 유류파동이 이 산업을 흔들었지만 원양어업은 1970년대 말 한국을 세계 상위권 원양조업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3 산업 기반이 거의 없던 나라에서, 바다로 나간 사람들의 노동이 국가 경제의 초석 하나를 놓은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항산과 인정 투쟁 사이
이 시기의 선원을 이해하는 데는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두 시선이 겹쳐질 수 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無恒産而有恒心者,惟士爲能。 (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
“일정한 생업 없이도 변치 않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
— 맹자, 『맹자』 양혜왕장구상8
맹자의 원래 문맥은 통치자를 향한 경고였다. 백성에게 안정된 생업(恒産, 항산)을 주지 않고서 도덕(恒心, 항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960년대 한국에서 원양어선은 그 생업을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마련했던 일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육지에는 일자리가 없었고, 바다는 목돈을 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선원이 존경받은 이유는 단지 용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노동이 가족과 마을의 생업을 실제로 지탱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다른 결의 설명이 가능하다. 헤겔은 인간이 진정한 자기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는 노동과 그것을 알아보는 타인의 시선 사이의 긴장으로 설명한 바 있다.9 목숨을 걸지 않는 노동은 인정을 얻지 못하며, 위험을 감수한 노동만이 존엄으로 승인된다는 것이다. 이 틀은 태풍과 조난의 위험을 무릅쓴 원양선원의 노동이 왜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 국가적 영웅으로 승인되었는지를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귀천의 역전
유교적 직업 관념 안에서 바다를 오가는 뱃사람의 자리는 본래 높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위계에서 상업과 결부된 노동은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렀다. 그런데 국가가 외화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던 그 순간, 이 위계는 그대로 뒤집혔다. 가장 낮았던 자리가 가장 우러르는 자리로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교적 직업 관념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결핍이 그 오래된 위계를 잠시 뒤집어 놓은 것이다.
맹자가 말한 생업과 헤겔이 말한 인정 투쟁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노동이 존엄으로 승인되려면, 그 노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은 그 공동체였고, 선원은 그 결핍이 만들어낸 영웅이었다. 지금 선원이라는 직업이 더 이상 그런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노동을 향한 공동체의 절박함이 옅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는 누구를 다시 영웅이라 부를 것인가
라스팔마스의 부두를 떠난 배들은 이제 대부분 다른 얼굴의 선원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그 배들이 실어 날랐던 것이 물고기와 외화만은 아니었다. 한 세대의 존엄과, 한 나라가 가장 절박했던 순간의 생업이 그 갑판 위에 함께 실려 있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오래된 말처럼, 선원이 영웅이었던 시절에도 분명 때가 있었다. 그 때가 지나갔다고 해서, 그 시절이 지탱했던 존엄까지 함께 지나간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이제 그 질문을 안고, 라스팔마스로 향했던 배들의 항적을 따라 외항선원 시리즈를 시작한다.
* 참고할 말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전도서 3:1
주1. 위키백과, ‘평화선’; 경향신문, “[경향으로 보는 ‘그때’] 1952년 1월 18일 평화선 선포” (2015.01.15)
주2. 위키백과, ‘지남호’; 부산일보, “[밀물썰물] 생참치회 시대” (2026.07.12)
주3. 이성일,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역사적 어획동향 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수산해양기술연구 61(1), 2025
주4. 주스페인 대한민국대사관 라스팔마스분관, ‘한국원양어선 라스팔마스 입항 60주년 기념행사’ 보도자료 (2026.05) / 글로벌비즈뉴스, “70년대 후반 한국원양어선 250척 조업…한해 20억 달러 외화 벌여” (2024.02)
주5. 글로벌비즈뉴스, 위의 글 (2024.02)
주6. MBC뉴스데스크, “1세대 원양어선원 유해, 40년 만에 고국 품으로” (2015.11.05)
주7. 국제신문, ‘이야기 공작소 — 우리나라 원양어업 스토리 여행 <5>’ (2017.02.26)
주8. 孟子, 『孟子』 梁惠王章句上
주9. G.W.F. Hegel,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중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주종관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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