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를 놓은 손
자율운항선박 시대, 다음 세대의 울산은 어디인가
한국 조선해양 시리즈 09편 · 바다 · 2026.07.07
선장이 손을 놓은 순간
2022년 6월, SK해운의 18만㎥급 초대형 LNG운반선 프리즘 커리지(Prism Courage)호가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프리포트에서 출항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충남 보령에 이르기까지, 33일간의 여정이었다. 총 항해 거리 약 2만km 중 절반인 1만km는 사람의 수동 조작 없이 스스로 항해한 구간이었다. 인공지능이 날씨와 파고, 주변 선박을 실시간으로 인지해 항로를 바꿨고, 100여 차례의 충돌 위험을 스스로 피했다. 선장과 선원은 배 위에 있었지만, 항해의 절반 동안 그들의 손은 키에서 떨어져 있었다.
같은 해, 노르웨이의 야라 버클랜드(Yara Birkeland)호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배는 애초 설계 단계에서부터 선원이 살아갈 공간 자체를 두지 않았다. 오슬로에 있는 육상 관제센터가 항해를 지켜보는 구조였다. 프리즘 커리지가 “선장의 역할이 재정의된 배”였다면, 야라 버클랜드는 “선장이라는 자리 자체를 다시 물은 배”에 가까웠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한국 조선업이 친환경 연료라는 새로운 지형 위에서 다음 백사장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다만 이제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 강철 선체만은 아닐 수 있다. 코드와 데이터 역시 같은 백사장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기계를 부수던 손
1811년 3월, 영국 노팅엄셔에서 한 무리의 방직 노동자들이 기계식 직조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이른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의 시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경기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기계는 숙련 노동자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순 것은 단지 나무와 철로 만든 기계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들이 감지한 것은 기계가 대체하는 것이 노동의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가 서 있던 자리 그 자체라는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지금 한국의 해기사 시장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최근 자율운항선박(MASS, Maritime Autonomous Surface Ships)에 관한 비강제 국제 코드를 채택했고, 2028년부터 강제 규범 개발에 착수해 2030년 채택, 2032년 발효를 목표로 하고 있다. 완전자율운항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선원의 역할은 사라지기보다 재편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다만 그 재편이 어떤 형태로 도착할지는, 1811년의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하여
장자(莊子)는 「양생주(養生主)」편에서 소를 잡는 백정 포정(庖丁)의 이야기를 전한다. 19년째 같은 칼을 쓰면서도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은 이유를 묻자, 포정은 이렇게 답한다.
臣之所好者道也,進乎技矣。
(신지소호자도야,진호기의。)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이며, 이는 기술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포정은 소의 몸에 힘으로 맞서지 않고, 뼈와 살 사이의 결을 따라 칼을 움직인다. 기술이 극한에 이르면 힘을 쓰지 않고도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우화의 요지다.
반면, 서양의 문명사적 시선은 이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 서문에서 국가를 일종의 인공적 생명체에 비유하며, 태엽과 톱니로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기계 또한 인공적 생명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가 그린 국가는 자연을 모방해 인간이 만든 거대한 인공 인간이었다.
자율운항 시스템이 “스스로 판단한다”고 부르는 것은, 홉스식으로 보면 인간이 설계한 규칙이 극한까지 정교해진 자동기계에 가까울 수 있다. 반면 장자식으로 보면, 그것은 결국 바다라는 자연의 결을 가장 정확히 따라가려는 기술의 한 형태로 읽힐 수도 있다. 같은 배 한 척이, 어느 쪽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 세대의 울산은 어디인가
러다이트의 저항, 홉스의 인공 인간, 장자의 무위(無爲)의 기술 — 이 세 갈래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때, 그 자리를 다시 정의하는 것은 누구인가.
1972년 정주영이 백사장에서 본 것이 조선소였다면, 지금 누군가는 같은 백사장에서 소프트웨어를 보고 있을 수 있다. 한국 조선업의 다음 경쟁력은 더 이상 용접선의 정밀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율운항 알고리즘, 디지털 트윈, 선박 데이터 표준 등의 영역에서 누가 먼저 표준 규칙을 세우느냐가 다음 패권을 가를 변수로 읽힐 수 있다.
중국이 압도적 물량으로 추격해오는 구도 속에서, 한국이 쥘 수 있는 패는 ‘더 많이’ 짓는 경쟁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표준을 세우지 못한 자리’를 먼저 점유하는 것일지 모른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다음 세대의 울산은 강철이 아니라 코드 위에 세워질 수도 있다는 질문이다.
우리가 아직 배우지 않은 조타술
포정은 19년 동안 같은 칼을 썼지만, 그 칼은 처음의 칼이 아니었다. 기술이 도(道)에 가까워질수록, 칼을 쓰는 사람의 손도 달라져 있었다.
자율운항선박 시대의 선장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키를 놓았다고 해서 항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야라 버클랜드호를 지켜보는 오슬로의 관제센터처럼, 어쩌면 손에 다시 쥐어야 할 것은 타륜이 아니라 육상의 화면 위에 뜬 데이터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누구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
* 참고할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언 16:9
주1. 莊子, 「養生主」, ‘포정해우(庖丁解牛)’ 우화, 도(道)와 기(技)의 관계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주2. Thomas Hobbes, 『Leviathan』 Introduction, 국가를 ‘인공 인간(Artificial Man)’에 비유한 대목 (신재일 역, 『리바이어던』,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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