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없는 전쟁의 시작

전쟁 없는 전쟁의 시작 — 얄타에서 38선까지

세계사-냉전-① · 1945~1950, 동맹이 적으로 변하기까지 걸린 다섯 해

세계사


평양에서 온 병사들

2024년 말, 러시아 쿠르스크 전선에 북한군이 나타났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제3국의 정규군이 투입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고, 서방 정보당국은 파병 규모를 수천 명에서 최대 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1

오늘날의 평양과 모스크바가 보여주는 밀착은, 실상 1945년 얄타에서 싹튼 거대한 냉전 질서의 유산이자 그 연장선상에 있는 현상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냉전은 1991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휴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155마일의 휴전선, 그리고 그 북쪽 정권이 러시아 전장에 병력을 보내는 이 구도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 이 모든 분단과 진영의 논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답은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한 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도 위에 그어진 30분

1945년 2월, 얄타에서 루스벨트와 처칠과 스탈린이 마주 앉았을 때, 세 사람의 관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본토였다.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안에 대일전에 참전하는 대가로 만주와 사할린, 쿠릴열도에 대한 이권을 약속받았다.2 한반도는 이 계산 속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은 변수였다.

실제로 얄타에서 세 정상이 가장 공들여 합의한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독일이었다. 패전을 눈앞에 둔 독일과 그 수도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이 나누어 점령하기로 결정되었고, 폴란드는 소련의 요구대로 동쪽 국경을 서쪽으로 옮기는 대신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3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세운 임시정부를 그대로 눌러앉혔고, 동유럽은 빠르게 공산화되었다.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사실 몇 달 앞서 폴란드에서 이미 예고된 패턴이었던 셈이다.

그해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가장 가까운 병력조차 오키나와에 있어 최소 한 달은 걸려야 한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4 소련군의 진격 속도를 본 미 국무부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단독 점령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8월 10일 밤, 국무부 3청사의 한 사무실에서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대령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펼쳐 놓고 30분 만에 북위 38도선을 그었다.5 이 선을 정할 때 두 사람이 참고한 것은 한반도의 지형도, 민족 구성도, 역사적 경계도 아니었다. 오직 서울을 미군 점령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 하나였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 한반도로서는 해방의 날이었지만, 동시에 그 해방은 이미 반으로 잘린 채 주어진 것이었다.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남쪽에 군정을 세웠을 때, 북쪽에는 이미 한 달 가까이 소련 25군이 주둔하고 있었다.6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은 한반도에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 합의의 배경과 주체가 국내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과정에서 실제와 다르게 알려졌다는 해석도 있다.7 이 안은 발표 직후 한반도 전역을 거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초기에는 격렬한 반탁 운동이 일어났으나 이내 좌익 세력의 찬탁 선회와 맞물렸고, 이는 극심한 좌우 대립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후 2년간 이어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역시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진 듯하다.

추구와 만인의 투쟁 사이

노자는 『도덕경』 5장에서 이렇게 썼다.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추구)처럼 대한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5장

노자가 말한 천지는 인간에게 특별한 애정도 악의도 품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운행 원리에 따라 만물을 대할 뿐이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가른 것 역시 한민족에 대한 증오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무심함의 이면에는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는 철저한 주체적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강대국의 행위를 자연의 무위(無爲)와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38선은 강대국의 감정적 증오가 아니라, 각자의 철저한 이익 계산 속에서 자라난 ‘인위적 냉혹함’의 결과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편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공통의 권위가 없는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불렀다.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억눌려 있던 근원적 불신이, 그 적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1945년 8월까지 미국과 소련을 묶어 두었던 것은 우정이 아니라 히틀러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었다. 그 적이 사라지자, 두 나라 사이에는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의 불안이 그대로 복원되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과 그해 6월 마셜 플랜은 이 불신이 봉쇄정책이라는 이름의 제도로 굳어지는 과정이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동맹은 왜 두 해 만에 무너졌는가

1945년 2월 얄타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세 정상은, 1948년이 되기도 전에 서로를 봉쇄와 위협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1948년 6월,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상 통로를 봉쇄했고, 미국과 영국은 11개월에 걸쳐 공수 작전으로 이에 맞섰다.8 같은 해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감시 하에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9월 9일에는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 임시로 그어졌던 군사분계선이 이때 두 개의 국가로 완성된 것이다.

1949년, 국제 질서의 무게중심은 더 빠르게 흔들렸다. 4월 서방 12개국이 나토를 창설했고, 8월 소련이 첫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다.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냉전의 전선은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급격히 확장됐다.9

한반도는 이제 유럽의 변방이 아니라, 두 진영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최전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태평양 방위선을 알류샨-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설정하며 한반도와 대만을 그 선 바깥에 두었다.10 이 발언을 둘러싼 역사가들의 해석은 지금도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이를 김일성과 스탈린의 남침을 유도한 신호로 해석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단순한 전략적 방어선 재조정이자 오판으로 판단한다. 다만 다섯 달 뒤 벌어진 비극을 고려할 때, 이 연설이 모종의 신호로 작용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1950년 6월, 38선은 전면전의 포화에 휩싸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선

이전 글 균열의 시대 편에서 살펴본 미·중 패권 경쟁의 단면들은, 실상 1945년 얄타에서 잉태된 오래된 균열의 원형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강대국의 계산 속에서 한 줄로 그어진 38선은, 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에서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세계는 냉전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선언한 지 36년이 넘도록 지금까지도 세계지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선이다.12

공교롭게도 같은 회담에서, 같은 논리로 갈라졌던 독일은 1990년 하나로 봉합되었다.11 강대국의 계산으로 그어진 선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운명을 맞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 선은 지우고, 다른 한 선은 그대로 남겨두는가.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1945년의 미국과 소련이 그랬듯, 지금의 강대국들도 자신들의 균형을 위해 다른 나라의 운명을 계산 속 변수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계산의 결과를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그 선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이 나라다.

그 30분 만에 그어진 선이 어떻게 3년간의 전면전과 수백만의 희생으로 이어졌는지는, 다음 편에서 이어 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선 위에 서서, 아직 답해지지 않은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다.


* 참고할 말씀: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리라’ — 하박국 2:1


1 북한군 러시아 파병 관련 서방 정보당국 추산, 2024년 말~2025년
2 얄타 극동밀약: 1945년 2월 11일
3 얄타회담 독일 4국 분할점령·폴란드 국경조정 및 자유선거 합의: 1945년 2월
4 미군 오키나와 주둔 및 한반도 도착 소요 기간 추산, 1945년 8월
5 38선 획정: 1945년 8월 10~11일, 딘 러스크·찰스 본스틸
6 소련군 한반도 진주: 1945년 8월 / 미군 인천 상륙: 1945년 9월 8일
7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합의의 국내 전달 과정을 둘러싼 왜곡 여부는 학계에서도 해석이 갈리는 지점이다
8 베를린 봉쇄: 1948년 6월~1949년 5월
9 나토 창설 1949년 4월 / 소련 원폭 실험 1949년 8월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10월 1일
10 애치슨 라인 연설: 1950년 1월 12일
11 독일 재통일: 1990년 10월 3일
12 몰타 회담: 1989년 12월 2~3일, 부시·고르바초프 냉전 종식 공동 선언

사상가 인용: 노자, 『도덕경』 5장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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