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불이 켜지는 교실

한글햇살버스 사업의 일환으로 젊은강사가 어르신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치는 모습

2026년 전국으로 확대 시행되는 ‘한글햇살버스’ 디지털 문해교육 현장. 시대는 변했어도 배움을 향한 열망과 세대 간의 연대는 이어지고 있다.

밤에만 불이 켜지는 교실

미싱 소리에서 스마트폰 알림음까지, 배움이라는 권리행사

2026.07.28 · 역사·철학 (한국현대사 시리즈)

버스가 밤마다 마을을 돈다

2026년, 정부는 ‘한글햇살버스’ 운행을 전국 아홉 개 지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6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찾아가는 이 버스가 가르치는 것은 한글 자모가 아니라 스마트폰 사용법과 키오스크 주문법이다.

40여 년 전의 문해교육이 ‘글자를 읽는 힘’을 다뤘다면, 지금의 문해교육은 ‘기계 앞에서 밀려나지 않는 힘’을 다룬다. 대상은 달라졌지만 이름은 같다. 여전히 이를 문해(文解)라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이다.

40여 년 전에도 누군가는 밤마다 불 켜진 교실을 스스로 찾아갔다.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상태로 계단을 올라가야 그 불빛에 닿을 수 있었다. 그들을 교실로 이끈 것은 동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읽어내려는 열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야학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농촌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 청년이 있던 교실에서 멀지 않은 곳, 도시의 공장 지대에서도 비슷한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평화시장 앞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서였다. 그의 죽음 이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노동자들 스스로 못다 한 배움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노동교실이라 불린 그 공간에서, 낮에는 미싱 앞에 앉아 있던 열예닐곱 살 노동자들이 밤이면 국어책과 산수책을 펼쳤다.1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문장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였다.

1980년대로 들어서며 이 흐름은 더 커졌다. 구로공단 인근에는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 같은 야학이 생겨나, 낮에는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밤에는 40~50명씩 교실을 채우던 노동자들이 있었다.2 같은 시기 대학에서는 ‘학출’이라 불리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공단으로 들어가 노동자 곁에서 글을 가르치며 함께 살았다. 1980년부터 1987년 사이, 상당한 수의 대학생이 공장으로 향했다.3

정권은 이 불빛을 경계했다. 1983년 말, 이른바 ‘야학연합회 사건’으로 서울 지역 30여 개 야학이 항의 성명을 냈고 조사 대상자만 500명에 달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전두환 정부는 ‘학원자율화조치’를 발표해 제적 학생과 해직 교수를 복권시켰다. 억누르던 손을 잠시 놓은 것이었지만, 그 유화 국면은 이듬해부터 다시 타오를 학생·노동운동의 불씨를 남겼다.4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왜 그토록 위험하게 여겨졌을까. 글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조건을 스스로 이름 붙이고 맞설 주체성을 얻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

마나과에서, 구로에서

같은 1980년, 지구 반대편 니카라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모사 독재가 무너진 이듬해, 산디니스타 정부는 ‘국가문해십자군 운동’을 선포했다. 1980년 3월부터 8월까지 다섯 달 동안, 인구 300만의 나라에서 10만 명이 동원되고 그중 6만 명이 자원해 산골 마을까지 들어가 글을 가르쳤다.

다만 두 풍경의 성격이 완전히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니카라과의 문해운동은 혁명정부가 국가 조직력을 총동원한 대중운동이었으며, 문맹 퇴치와 혁명 이념 교육이 병행되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5 반면 구로와 청계의 야학은 정권의 감시를 피해 은밀하게 이어간 아래로부터의 배움이었다. 이 정치적 성격의 차이는 두 사례를 같은 성공담으로 쉽게 묶어버리기 전에 짚어야 할 지점이다.

니카라과의 문맹률이 50%에서 13%로 감소했다는 발표 역시 다소 과장되었다는 학계의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5 성과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 다섯 달을 통과한 사람들의 기억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두 사회가 같은 시기에 붙든 것은 하나였다 —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곧 존엄을 스스로 되찾는 행위라는 확신이었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 왜 어느 시대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교실 문을 두드리는가.

역사는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배움은 언제나 다른 이름의 권리 투쟁이었다

야학에서 배운 것은 구구단만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쓸 줄 알게 된다는 것, 버스 노선표를 스스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임금명세서에 적힌 숫자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된다는 것 — 이 모든 것은 시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과 대등하게 마주 설 자격을 스스로 쟁취해낸 결과였다.

니카라과의 문해운동도, 구로의 노동야학도, 결과의 정밀한 통계로만 평가한다면 그 의미는 쉽게 축소된다. 그러나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편지를 써 내려간 사람의 손끝에 남은 감각일 것이다.

2026년의 한글햇살버스가 가르치는 것도 다르지 않다. 키오스크 버튼 하나를 스스로 누르게 되는 순간, 어떤 노인은 자신이 여전히 이 사회의 존엄한 구성원이라는 감각을 서서히 되찾아갈는지도 모른다. 시대는 미싱 소리에서 스마트폰 알림음으로 바뀌었어도, 배움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읽힐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에게 배움을 나눠주고 있는가

야학의 불빛은 오래전에 꺼졌다. 청계피복노조도, 학출도, 이제는 역사책 속의 이름이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평생학습과 재교육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고령층의 디지털 소외, 은퇴 이후 다시 자격증 시험장을 찾는 중장년, 늦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이들 — 이 시대의 야학은 교실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위에, 유튜브 강의 속에, 지역 평생학습관 한 켠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배움을 보장하는 일은 누군가의 시혜가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가 당연히 떠안아야 할 책무라는 사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낮에는 미싱을 돌리고 밤에는 글을 익히던 그 노동자들의 손끝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이 놓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훗날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의 빛나는 성과표 뒤편에는 언제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개개인의 치열한 열망이 숨어 있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사건을 사건으로 읽지 않는다. 40년 전 다락방에서 서로에게 글을 가르치던 손길과, 오늘 마을회관을 찾는 버스 한 대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배움을 나눠주고 있는가. 그 질문을 이번 편의 마지막 자리에 남겨둔다.


* 참고할 말씀: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 디모데후서 2:2


1. 한국일보, 「전태일의 꿈 이어받은 십대 여공들… ‘피복노조’의 50년」, 2020.10.15.

2. 디지털구로문화대전, 「주경야독의 터전, 야학과 직업 학교를 아시나요」, 구로문화원.

3. 한국노동연구원, 『학출: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4. 나무위키, ‘1983년’ 문서 (학원자율화조치·야학연합회 사건 서술 참고 후 재구성).

5. 나무위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문서 (니카라과 국가문해십자군 운동 통계 논쟁·이념교육 병행 평가, 노동자연대 재인용 포함, 서술 참고 후 재구성).

6.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6년 성인 문해교육 지원, 이렇게 달라집니다」, 20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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