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거리의 함정

등거리의 함정 — 두 강대국 사이,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광해군의 밀지에서 안동 만찬까지, 40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

2026년 6월 · Watchman · 정치·외교

2026년 5월, 열흘 간격으로 두 개의 장면이 펼쳐졌다.

5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두 시간 넘게 마주 앉았다. 이란·중동 사태, 반도체, 희토류. 회담은 공동성명도, 합의문도, 공동 기자회견도 없이 끝났다. 한반도와 북핵 문제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선순위 의제에 들지 못했다.”1 한국은 회담 다음 날, 우리 측 요청으로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 설명을 들었다.2

5월 19일, 경북 안동. 이재명 대통령이 호텔 입구까지 직접 나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맞이했다. 취타대와 전통 의장대가 일본 총리의 차량을 호위했다. 두 정상은 소인수 회담에 이어 만찬 자리에 마주 앉았다. 안동 한우 갈비찜과 돗토리현 대게가 함께 올랐다.3

미중이 한반도를 의제 밖으로 밀어내던 바로 그 주에, 한국은 일본과 대통령의 고향에서 만찬을 나눴다.

이것은 균형인가, 회피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엇인가.


밀지(密旨) —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내린 명령

때는 1618년 8월, 광해군 10년이었다.

만주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지 2년이 지났고, 후금의 군대는 명나라의 요동을 잠식하고 있었다.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지배층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다.

광해군은 결국 군대를 보냈다. 도원수 강홍립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광해군은 출발 직전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렸다.

“명 장수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을 쓰라.”4

노자가 『도덕경』 22장에서 말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굽히면 온전하고, 휘면 곧아지며, 낮은 곳은 채워진다.

명을 향해서도 굽히고, 후금을 향해서도 굽힘으로써 온전함을 유지한다. 광해군의 밀지는 노자의 언어로 쓰인 외교 전략이었다.

1619년 3월,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후금에게 대패했다.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금 진영에 투항하며 말했다. “후금과의 싸움은 조선의 뜻이 아니며, 왕의 뜻을 받아 항복한다.”5 후금은 이에 화답했다. “조선의 사정을 이해한다. 우호관계를 유지하자.”

명에게는 파병의 명분을 지켰다. 후금에게는 적대의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4년 후인 1623년 3월,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다. 그를 몰아낸 서인들의 명분은 하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내통했다.”

실리를 취한 자가 명분에 의해 무너졌다. 그리고 명분을 앞세운 인조 정권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차례로 맞이했다. 굽힘이 온전함을 보장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명분이 생존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쉽게 답하지 않는다.


가마 속의 왕 — 고종의 러시아 카드

광해군의 실험이 끝나고 270년이 지난 1896년 2월 11일 새벽, 조선의 고종은 궁녀의 가마에 몸을 숨겼다.

1895년 10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고종은 경복궁에 갇혀 있었고, 언제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택한 탈출구는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가마를 탄 고종은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일국의 왕이 외국 공관으로 피신한 것이다.6

고종의 계산은 이러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고종은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과 재정 고문을 요청했다. 친일 내각은 무너졌다. 표면적으로 일본의 영향력은 후퇴했다.

그러나 계산의 균열은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었다. 러시아를 지렛대로 삼는다는 것은, 그 지렛대가 버티는 한에서만 유효한 전략이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했듯, 국가들 사이에는 분쟁을 중재할 공통 권위가 없다.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이 달라지는 순간 어제의 보호자에서 오늘의 방관자가 된다. 고종이 기댄 것은 러시아의 선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이해관계였다 — 그 이해관계는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체결 이후 공식 소멸했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고종이 9년간 가꿔온 지렛대가 부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몇 달이었다. 광해군이 명분에 의해 무너졌다면, 고종은 힘의 재편에 의해 무너졌다. 경로는 달랐지만, 두 왕 모두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제3의 변수를 끌어들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같았다.


세 번째 지렛대 — 변수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두 장면으로 돌아온다.

안동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합의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구조가 드러난다. 한일 양국은 지난 3월 체결된 ‘한일 공급망 파트너십’의 성과를 평가하고, LNG와 원유 분야의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한일이 공급망 위기를 겪는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도 함께 협력을 심화하자고 제안했다.7 한일 안보정책협의회가 최초로 차관급으로 격상된 것도 이날 확인됐다.

이 합의들이 놓인 맥락을 살펴야 한다. 미국은 이미 2025년부터 한국, 일본을 포함한 8개 동맹국과 반도체·핵심 광물 공급망 협정을 추진해왔다. 중국에 대한 기술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재편하기 위해서다.8 한일의 밀착은 순수한 양자 관계의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설계한 대중 압박 구조 안에서,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명·후금 사이에서 후금을 비밀 채널로 삼았다면, 고종이 일·러 사이에서 러시아를 지렛대로 삼았다면, 오늘의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일본을 그 자리에 놓고 있다. 변수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두 강대국의 압력이 커질 때 한국이 제3의 지렛대를 찾는다는 구조는 400년 동안 반복됐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광해군의 후금 카드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설계한 선택이었다. 고종의 러시아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한일 밀착은 한국이 설계한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설계한 구조 안에서 한국에게 주어진 선택지인가. 지렛대를 스스로 쥔 것과, 지렛대 위에 올려진 것은 같은 그림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위치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

균형외교는 두 강대국 모두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작동한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한국이 두 강대국 모두로부터 동시에, 진심으로 인정받은 시간은 과연 얼마나 길었는가.

안동의 만찬이 지혜로운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400년 전 강홍립의 밀지와 같은 구조의 반복인지 — 그 답은 아직 역사가 쓰고 있는 중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알지 못한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 참고할 말씀: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 잠언 11:14


1 “미중 정상회담, 한반도는 후순위…중동에 시선 쏠려” — RFA 한국어, 2026.05.15

2 “한미 정상 통화…미중 정상회담 결과 등 논의” — MBC 뉴스, 2026.05.15

3 “이 대통령, 안동에서 다카이치 총리와 정상회담…’고향 셔틀외교’ 완성” — MBC 뉴스데스크, 2026.05.19

4 광해군 밀지 관련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강홍립 항목

5 강홍립 투항 경위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6 아관파천 경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 대통령 ‘한일 공급망 협력 확대…원유 비축정보 소통 심화'” — 연합뉴스, 2026.05.19

8 “미국, 한·일 등 8개 동맹국과 반도체·광물 공급망 강화 추진” — MBC 뉴스, 2025.12.03; KIEP, 「미중경쟁에 따른 공급망 재편과 한국의 대응방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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