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나라 — 로마의 게르만인과 독일의 ‘손님들’이 예고한 오늘
노동력을 부른 자리에서, 사회는 무엇을 준비했어야 했는가
이중의 수축: 한국의 현실로 읽는 세계 현대사의 구조 | 제5편 · 2026년 7월 · Watchman
※ 앞선 글에서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어떻게 군중이 되는지, 진나라 말기의 봉기와 나치즘이 공유한 하나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 → 제4편: 군중은 어디서 오는가 — 나치즘과 진승오광의 난이 공유한 하나의 법칙
이방인 없이는 멈추는 공장, 이방인을 밀어내는 여론
새벽 5시, 경기도의 한 농장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물을 다루는 손은 대부분 한국어가 서툴다. 부산의 조선소 하청 공정, 안산의 반도체 부품 라인, 전국 각지의 요양병원 야간 근무조 — 이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제 내국인이 아니다. 통계청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자료를 종합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은 이미 250만 명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용허가제(EPS)를 통해 들어온 비전문 인력만도 수십만 명 규모다. 이 숫자는 해마다 경신되며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같은 시간, 정치의 언어는 다른 곳을 향한다. 선거철마다 특정 지역의 외국인 범죄율이 언급되고, 다문화 가정 지원 예산이 삭감 대상으로 거론되며,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우리 동네가 바뀌고 있다”는 불안이 떠돈다. 노동시장은 이방인을 부르고, 여론은 이방인을 밀어낸다. 이 두 힘은 지금 같은 사회 안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모순은 새롭지 않다. 인구가 줄고 노동력이 마르는 사회가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들이는 순간, 그 사회는 반드시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노동력으로만 부를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못한 문명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대 아테네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로마이며, 가장 최근은 서독이다.
제국이 사람을 빌려올 때 — 로마의 게르만인들
4세기 로마 제국은 겉으로는 여전히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그 내부는 이미 오랫동안 인구학적으로 수축하고 있었다. 2세기 후반 안토니누스 역병과 3세기 키프리아누스 역병은 로마 인구의 상당 부분을 앗아갔고, 이후 회복은 더뎠다. 자영농은 무거운 세금과 반복되는 전쟁 징집 속에서 몰락했고, 로마 시민 가운데 군대에 자원하려는 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제국을 지키는 병력은 있어야 했지만, 그 병력을 채울 로마인은 부족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게르만족이었다. 로마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너머의 게르만 부족들과 조약을 맺고, 이들을 ‘동맹군(foederati)’이라는 이름으로 군단에 편입시켰다. 처음에는 보조 병력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방인의 창을 빌려야 했다.
376년, 이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훈족에게 밀려난 고트족 수만 명이 다뉴브강 앞에 도착해 로마 영내로의 피난을 요청했다. 황제 발렌스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병력과 세수를 동시에 확보할 기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의 로마 관리들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착취했다. 식량을 대가로 무리한 값을 요구했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로마 관리들은 개 한 마리당 고트족 추장이나 귀족 가문의 아들 한 명을 노예로 요구했다. 자식이 굶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개고기와 바꾸어 로마에 노예로 넘겨야 했다.¹ 받아들이겠다는 결정과, 받아들인 이들을 실제로 대우하는 방식 사이에 깊은 간극이 있었다.
그 간극은 폭발했다. 착취에 시달리던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378년 8월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했다. 황제 발렌스 자신도 전사했다.² 제국은 이방인의 노동과 병력 없이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었지만, 그 이방인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포용할 제도와 문화를 끝내 마련하지 못했다.
이 위선은 로마만의 것이 아니었다. 800년 앞선 고대 아테네도 같은 계산을 했다. 아테네는 체류 외국인 ‘메토이코이(Metoikoi)’에게 무거운 특별세를 걷고 전시에는 군 복무 의무까지 지웠다. 그러나 시민권만큼은 끝내 내주지 않았다. 경제적 기여는 흡수하되 정치적 권리는 배제하는 이 구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구가 소진되던 아테네가 스스로 군사력의 기반을 좁혀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로마와 아테네 사이에는 800년의 시차가 있지만, “필요할 때만 부르고 필요가 끝나면 경계 밖에 세운다”는 계산은 놀랍도록 동일하다.
이방인을 ‘손님’이라 부른 나라 — 독일의 게스트아르바이터
1,577년 뒤, 유럽의 다른 지점에서 비슷한 구조가 다시 나타났다. 다만 이번에는 창이 아니라 컨베이어벨트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인력 부족에 직면했다. 전쟁으로 청년 남성 인구가 급감했고, 베를린 장벽 건설(1961년 8월) 이후에는 동독으로부터의 노동력 유입마저 끊겼다. 서독 정부는 1955년 12월 이탈리아와, 1961년 10월 터키와 잇따라 노동자 모집 협정을 체결했다.³ 이 협정으로 들어온 이들은 ‘게스트아르바이터(Gastarbeiter)’, 즉 ‘손님 노동자’라 불렸다.
이 명칭 자체가 정책의 전제를 드러낸다. 서독 정부는 이들을 정착민이 아니라 일정 기간 일하고 돌아갈 손님으로 설계했다. 이른바 ‘순환 원칙(Rotationsprinzip)’ — 몇 년마다 노동자를 교체해 정착을 막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기업들은 숙련된 노동자를 훈련시켜 놓고 다시 돌려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노동자들 역시 가족을 독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1차 오일쇼크의 충격 속에서 서독 정부는 신규 모집을 전면 중단했다(Anwerbestopp). 그러나 이미 정착한 노동자들은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모집이 끊기자 “지금 돌아가면 다시 올 수 없다”는 불안이 역설적으로 이들을 독일에 눌러앉게 만들었다. 가족 재결합이 이어졌고, 2세와 3세가 태어났다. 오늘날 독일에는 터키계 주민만 300만 명 안팎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 다수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일 시민이다.⁴
그러나 독일의 실패를 사회의 배제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통합은 한 방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당수 튀르키예계 이주민은 독일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거리를 두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언어와 관습을 고수하며 이른바 ‘평행사회(Parallellgesellschaft)’를 형성했다 — 사회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어느 정도까지 붙잡을 것인가는 이주민 공동체 스스로의 선택이기도 했다. 독일 사회가 문을 늦게 열었다는 점, 그리고 열린 문 앞에서 양쪽 모두 서로에게 완전히 다가서지는 않았다는 점. 이 둘은 따로 떼어놓고 볼 문제가 아니다.
더 냉정한 사실도 있다. 시민권 취득은 오랫동안 까다로웠고(독일은 2000년에야 속지주의 요소를 도입하는 국적법 개정을 단행했다), 그 지체는 지금도 독일 정치를 가르는 하나의 축이다. 그런데 시민권이 뒤늦게 주어진 이후에도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독일 국적을 취득한 튀르키예계 유권자의 상당수가 독일 국내 정치보다 튀르키예 본국 선거에서 에르도안 정권을 강하게 지지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이는 소속감이 시민권이라는 제도적 서류 한 장으로 자동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소속감을 만드는 데는 서류보다 훨씬 긴 시간과, 훨씬 촘촘한 일상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부르면서 거부하는 나라들 — 아테네, 로마, 독일, 그리고 한국
아테네와 로마와 독일 사이에는 2,300년의 시간과 세금과 창과 컨베이어벨트라는 전혀 다른 도구가 있다. 그러나 세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구조가 겹쳐진다. 수축하는 사회는 노동력을 부르는 결정은 신속하게 내리지만, 그 노동력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은 끝까지 미룬다. 아테네는 메토이코이의 세금을 걷으면서 시민권은 내주지 않았다. 로마는 게르만인의 창을 빌리면서도 그들을 로마인으로 대우하는 제도를 완성하지 못했다. 서독은 튀르키예인의 노동을 빌리면서도 그들을 독일인으로 부르는 언어를 수십 년간 유보했다.
법이 손님이라 부른 사람들은, 결국 그 나라의 아이를 낳고 그 나라의 언어로 싸운다.
이 패턴에는 계급의 층위도 있다. 이민 확대의 여파는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르게 체감된다. 상위 계층에게 저임금 외국인 노동력의 유입은 육아 도우미, 요양 인력, 3D 업종 인력 공급이라는 형태의 편익으로 다가온다. 반면 유사한 직종에서 경쟁하는 자국 하위 노동계층에게는 일자리 경쟁과 임금 하락 압박으로 다가온다. 서구에서 반이민 정서가 유독 하층 노동자 계급에서 강하게 분출되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의 여론 분열 역시 단순한 배타적 정서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그 안에는 생존을 다투는 계급적 긴장이 함께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2020년대 한국의 조건은 다르게 보이지만 구조는 같다. 합계출산율이 0.7명 안팎까지 내려앉은 상황에서, 농업과 어업과 조선업과 요양 현장은 이미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가동되지 않는다.⁵ 정부가 고용허가제 쿼터를 매년 확대하는 만큼 노동력 수요는 명백하다. 하지만 이들을 받아들일 사회적 합의는 아직 요원하다. 영주권과 국적 취득의 경로는 여전히 좁고,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이동 제한은 그들을 사실상 특정 고용주에게 묶어두는 구조라는 비판이 반복된다.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이미 통계적으로 무너진 지 오래이나, 공적 언어와 제도는 그 신화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한국 사회가 이방인을 ‘손님’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아테네가 시민권 없는 세금으로, 로마가 아드리아노플에서, 독일이 반세기 뒤의 정치적 균열에서 치른 대가는 같은 질문에서 비롯됐다. 노동은 빌릴 수 있지만, 소속감은 빌릴 수 없다. 소속감은 오직 제도와 시간과 반복된 정직한 대우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수축의 법칙을 깨기 위한 한국 지성계의 과제
아테네도, 로마도, 독일도 이방인 없이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했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다. 그 부름에 걸맞은 제도를 얼마나 정직하게, 얼마나 서둘러 설계하느냐다.
첫째, 정착형과 순환형을 분리하는 이원화 설계다.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동일한 영주권 경로를 여는 것은 낭만적이지만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의료·연금·복지 비용까지 감당해야 하는 정착형 이민과, 일정 기간 근무 후 순환하는 단순 노무 인력은 애초에 다른 제도로 설계되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단순 노무직에 엄격한 순환 원칙을 적용하면서도 고급 인력은 철저히 흡수하고, 특정 인종이 한곳에 몰리는 것을 공공주택 쿼터제로 법제화해 막는다. 캐나다는 언어·학력·경력을 점수화하는 점수제(Express Entry)로 ‘준비된 이민자’를 선별해 초기 갈등을 최소화한다. 두 모델 모두 극단적이지만, 그 정교함만큼은 한국이 참고할 지점이다. 다만 어느 모델을 택하든, 형식적으로 국적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통합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 — 이는 동화주의를 채택했던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다.
둘째, 사업장 이동 제한의 전면 재검토다. 특정 고용주에게 사실상 묶여 있는 현재의 고용허가제 구조는 노동력 확보라는 단기 목적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착취적 관계를 구조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는 4세기 로마 관리들이 다뉴브강의 고트족을 대했던 방식과 본질적으로 멀지 않다.
셋째, 2세대를 위한 교육·언어 인프라의 전국 표준화다. 독일의 실패는 노동자 세대가 아니라 그 자녀 세대의 통합 지체에서 정치적 균열로 폭발했다. 다문화 가정 2세가 이미 수십만 명에 이르는 한국은 이 실패를 미리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넷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사회 계약의 언어를 다시 쓰는 일이다. 단일민족이라는 서사로는 더 이상 이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언어는 혈통이 아니라 기여와 책임으로 구성원을 정의하는 언어여야 한다.
지금 국내에서도 이 질문은 이미 제도의 문턱에 걸려 있다. 출입국·이민을 총괄할 이민청 신설은 여야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고 알려지면서도, 정작 관련 법안은 여러 해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조직을 어디에 둘지를 둘러싼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은 뜨겁지만, 그 조직이 담아야 할 통합의 내용 — 영주권 경로, 사업장 이동의 자유, 2세 교육 — 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그릇을 어디에 놓을지보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가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만하다.
아테네는 세금을 걷고 시민권을 내주지 않아 인구 기반을 좁혔다. 로마는 창을 빌리고 소속을 내주지 않아 무너졌다. 독일은 반세기 만에 그 청구서를 받아들었다. 한국은 아직 답을 쓰지 않은 페이지 위에 있다. 이 페이지에 무엇을 적을 것인가 — 그것이 지금 이 사회에 남겨진, 미루어서는 안 될 질문이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이 시리즈에서 계속 좇는 것도 바로 그 질문이다.
* 참고할 말씀: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본토인과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느니라’ — 레위기 19:34
¹ Ammianus Marcellinus, Res Gestae, Book XXXI.
² Peter Heather,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Macmillan (2005).
³ Ulrich Herbert, A History of Foreign Labor in German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0).
⁴ 독일연방통계청(Destatis) 이주배경 인구 통계 관련 보도자료.
⁵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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