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을 꿈꾼 섬나라 — 팽창과 자멸의 80년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
2026년 7월 · 카테고리: 세계사 · Watchman
【세계사-제국】 제국의 흥망 ⑥ / 8편
배움이 야망이 될 때 — 1853년 여름의 충격
1853년 7월 8일, 에도(江戸) 만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네 척의 군함이 나타났다.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 Perry) 준장이 이끄는 이 함대는 250년간 닫혀 있던 일본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구로후네(黒船, 흑선)’라 불렀다. 증기 기관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목선 군함의 검은 선체와 굉음은 단순한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명적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 충격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역사상 다른 어느 나라와도 달랐다. 굴복했으나 굴종하지 않았다. 흉내 냈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배움을 통해 제국을 분쇄하려 했으나, 그 배움이 일본 자신을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제국은 배웠던 방식 그대로 무너졌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대영제국이 ‘언어’라는 가장 정교한 도구로 세계를 재설계하고, 그 언어가 지배자보다 오래 살아남는 역설을 살펴보았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대영제국의 언어 전략을 살펴보았다.) 1868년에서 1945년까지 — 그 77년의 궤적은 근대사에서 가장 압축적인 흥망의 기록이다.
모방의 설계자들 — 메이지의 선택
1868년 1월, 교토 궁정에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선포됐다.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260년 통치가 끝나고, 15세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전면에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조슈(長州)·사쓰마(薩摩) 번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장악했다. 유신의 토대를 놓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 이어, 근대 국가의 뼈대를 설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세대가 뒤를 받았다. 이들 모두가 페리의 흑선이 가져온 충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흡수한 세대였다.
메이지 정부의 첫 번째 결정은 서구를 배우는 것이었다.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단장으로 한 총 107명의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12개국을 1년 10개월 동안 순방했다.¹ 사법 제도, 의회 구조, 군사 조직, 금융 시스템, 교육 체계 — 근대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의 설계도를 베꼈다.
육군은 초기 프랑스식을 모델로 출발했으나,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격파하는 것을 목격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주도 아래 1880년대에 이르러 독일(프로이센)식 체제로 전면 전환됐다. 해군은 영국식으로, 법률은 프랑스 민법을 기초로, 의회는 프로이센 헌법을 모델로 설계됐다.
그런데 이 배움의 과정에서 일본은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서구 문명의 원리를 배운 것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문법을 배운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리고 그 문법을 아시아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했다.
팽창의 논리 — 세 번의 전쟁과 한 번의 함정
메이지 일본의 팽창은 무질서한 정복이 아니었다. 각 단계마다 명분이 있었고, 각 승리마다 새로운 야망이 생겨났다.
첫 번째 단계 — 청일전쟁(1894~1895):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열도를 할양하고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했다.²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三國干涉)으로 랴오둥 반도를 되돌려줘야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일본 언론을 뒤덮었다. 복수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두 번째 단계 — 러일전쟁(1904~1905): 1905년 5월 쓰시마(對馬)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러시아 발틱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아시아의 신흥 강국이 유럽의 거대 제국을 상대로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준 전쟁이었다.³ 이 승리를 바탕으로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독점하였고, 1910년 8월 조선 국권은 피탈되었다.
세 번째 단계 —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확장: 1915년 1월, 중국에 ’21개조 요구(二十一個條要求)’를 제출했다. 일본은 이미 아시아의 패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 차례에 걸친 팽창 과정에서 동일한 패턴이 반복됐다. 승리한 후 더 큰 것을 요구했고, 그 요구가 주변을 자극했으며, 자극을 받은 주변과의 갈등이 다시 전쟁의 구실이 됐다.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록한 아테네의 패턴이 2,300년 뒤 태평양에서 반복되고 있었다고 읽힐 수 있다.
“아테네인들이 스스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가자,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타)의 두려움도 함께 커졌다. 그것이 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3절⁴
신흥 강국 일본의 부상이 기존 태평양 질서를 쥔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그 긴장이 충돌로 이어지는 구조 —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이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라 명명한 이 역학이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전쟁의 전쟁 — 만주, 중국, 그리고 태평양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 선양(瀋陽) 외곽 류탸오후(柳條湖) 인근 남만주철도 선로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관동군(關東軍) 장교들이 스스로 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꾸민 자작극이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이 도발은 만주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기 위한 구실이었다.
일본 육군은 도쿄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당시 와카쓰키(若槻) 내각은 사태 확대를 막으려 했으나, 군부를 통제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메이지 헌법이 육군의 통수권을 내각이 아닌 천황 직속으로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문민 정부는 군부의 폭주를 바라보면서도 제어하지 못했다.
1932년 3월,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됐다.⁵ 명목상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였으나, 실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독립 국가의 외양을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일본 군부가 조종하는 괴뢰국이었다. 국제연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은 1933년 3월 연맹을 탈퇴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중일 전면전의 포성이 울렸다.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던 일본의 호언은 무색해졌고, 전선은 8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일본은 또 다른 무리수를 두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연간 석유 소비량의 8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미국·영국·네덜란드가 펼친 대일(對日) 석유 금수조치는 일본의 목줄을 죄는 절체절명의 위기나 다름없었다.⁶
그러나 이는 파멸을 재촉한 전략적 오판이었다. 진주만에서 파괴된 전함들의 대부분은 수리 가능했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항공모함 전단은 그날 진주만에 없었다. 일본은 미국의 분노를 최대로 자극하면서 미국의 핵심 전력을 살려두었다.
손자가 경고하고 한비자가 예언한 것
知彼知己,百戰不殆。(지피지기,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 손자(孫子),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편(謀攻篇)⁷
일본 군부는 적을 알려고만 했을 뿐, 스스로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1941년 당시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일본의 약 12배였다.⁸ 지피(知彼)는 있었으나 지기(知己)는 없었다.
國小而不處卑,力少而不畏強,無禮而侮大鄰,貪愎而拙交者,可亡也。
(국소이불처비,역소이불외강,무례이모대린,탐폄이졸교자,가망야。)
“국력이 작으면서도 겸손하지 않고, 힘이 약하면서도 강대국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의 없이 강한 이웃을 모욕하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외교에 서툰 자는 망할 수 있다.”
— 한비자(韓非子), 《한비자(韓非子)》, 망징편(亡徵篇)⁹
청일·러일전쟁의 승리에 취한 일본은 스스로 가진 산업과 보급의 한계를 망각했다.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거대한 생산력과 맞서기로 한 그들의 선택은, 한비자가 경고한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자의 파멸’이라는 예언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론(Vom Kriege)》에서 전쟁을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 정의했다.¹⁰ 1930년대 이후 현지 군부(관동군 등)가 독단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도쿄의 내각이 이를 추인하는 구조로 전락했을 때, 제국의 의사결정은 이미 합리적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의가 뒤집혔을 때, 제국의 운명도 함께 뒤집혔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섬은 대륙의 꿈을 꿀 수 있는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미 전함 미주리(Missouri) 함상에서 일본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77년 전 구로후네가 에도 만에 나타났던 바로 그 바다였다. 역사는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닫힌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 전역에서 1,500만~2,0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일본 군인과 민간인도 3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¹¹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배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과, 강해진 이후 스스로를 아는 것 — 이 두 가지 중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그 물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 참고할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잠언 16:18
각주 및 출처
¹ 이와쿠라 사절단: Kume Kunitake, The Iwakura Embassy 1871–73 (Princeton, 2002)
² 시모노세키 조약: Stewart Lone, Japan’s First Modern War (Macmillan, 1994)
³ 러일전쟁의 세계적 영향: Pankaj Mishra, From the Ruins of Empire (FSG, 2012)
⁴ 투키디데스: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ook I, 23
⑤ 만주사변: Louise Young, Japan’s Total Empire (UC Press, 1998)
⑥ 미국의 석유 금수: Waldo Heinrichs, Threshold of War (Oxford, 1988)
⑦ 손자: 《손자병법》 모공편
⑧ 미일 철강 생산량: John Ellis, Brute Force (Viking, 1990)
⑨ 한비자: 《한비자》 망징편(亡徵篇)
⑩ 클라우제비츠: Carl von Clausewitz, Vom Kriege (1832); 김만수 역, 《전쟁론》(갈무리, 2006)
⑪ 희생자 수: John W. Dower, Embracing Defeat (Norton, 1999); R. J. Rummel 통계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