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한국현대-행복-⑨ · 2010년대
역사 · 한국현대사 | 2026.08.06
새벽 다섯 시, 봉고차가 서는 자리
경기도의 한 농공단지, 새벽 다섯 시. 가로등 하나 없는 공터에 봉고차 한 대가 서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 나온다.
베트남 억양의 한국어, 캄보디아 억양의 한국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뒤섞인다.
이 시간, 이 자리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2019년 12월, 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가 발표한 실태조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됐다 — 한국 농어촌·제조업 현장의 새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외국인의 시간이었다는 것.
그런데 이 새벽은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사건이 되어야만, 그러니까 누군가 다치거나 죽어야만 잠깐 조명이 켜졌다가 다시 꺼진다.
이건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한국 사회가 보지 않기로 한 이야기일 뿐이다.
1990년대 연수생에서 2010년대 고용허가제까지
이 새벽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초의 산업연수생 제도와 만난다.
1993년 11월, 정부는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곧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노동”이라는 비판에 부딪혔다.
연수생 신분이었기에 최저임금도, 산재보험도 온전히 적용되지 않았고, 사업장을 옮길 자유조차 없었다.
2004년 8월, 정부는 이 문제를 해소하겠다며 고용허가제(EPS)를 도입했다. 외국인도 이제 ‘노동자’로서 계약을 맺는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이 제도 아래에서 외국인 근로자 수는 2000년대 초 10만 명 수준에서 2010년대에 이르러 40만 명을 넘어섰고, 취업자격 체류 외국인은 60만 명 내외를 유지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통계로 보면 명백한 ‘제도화’였다.
그러나 그 제도 안에는 여전히 좁은 문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세 차례로 제한하고, 그마저도 고용주의 동의 없이는 옮길 수 없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름은 ‘근로자’로 바뀌었지만, 이동의 자유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 있던 새벽의 자리는, 제도의 이름이 바뀐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라인강의 손님, 사막의 손, 방리유의 아이들
이 패턴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1955년 12월, 서독 정부는 이탈리아와 ‘초빙노동자(Gastarbeiter)’ 협정을 맺었다.
이후 튀르키예(1961년 10월), 유고슬라비아(1968년)까지 협정이 확대되며 수백만 명이 라인강 유역의 공장으로 향했다.
서독 정부의 입장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 필요한 것은 노동력이지, 정착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프리쉬는 1965년, 그 계산이 어긋났음을 짧은 한 문장으로 짚었다.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는데, 사람이 왔다.”
정부는 단순한 ‘노동력’만을 필요로 했을지 모르나, 그 노동 뒤에는 언제나 삶과 이름, 그리고 가족이 함께 따라왔던 셈이다.
같은 시기 프랑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전후 30년 호황기(이른바 ‘영광의 30년’), 프랑스는 알제리·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이 도시 외곽의 방리유(Banlieue)에 정착하면서도 사회의 중심으로는 온전히 들어오지 못했고, 프랑스 역시 그 균열을 완전히 봉합하지 못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구조는 유럽만의 것도 아니었다.
걸프 산유국의 카팔라(Kafala) 제도는 고용주가 외국인 노동자의 체류 자격과 이동의 자유까지 사실상 통제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노동자의 기본권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을 국제 인권기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왔다.
194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브라세로 프로그램(Bracero Program) 역시 멕시코 농업 노동자를 계절 단위로 불러들이고 계약이 끝나면 돌려보내는 구조였으며, 임금 체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프로그램 종료의 한 배경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대도 대륙도 다르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두 장면, 그리고 그 곁의 사례들은 하나의 질문 앞에 나란히 선다 — 경제는 사람을 불렀는데, 사회는 노동만 받으려 한 것은 아닌가.
환대 없는 필요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국의 고용허가제와 서독의 초빙노동자 협정, 프랑스의 이민 노동, 걸프의 카팔라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네 제도 모두 “노동은 수입하되, 정착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된 궤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法者,編著之圖籍,設之於官府,而布之於百姓者也。
(법자, 편저지도적, 설지어관부, 이포지어백성자야。)
“법이란 문서로 편찬하여 관부에 갖추어 두고,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다.” — 한비자
그러나 법이 문서와 제도에만 머물고, 그 제도가 본래 지키려 했던 사람의 생존에까지 닿지 못한다면, 법은 통치의 수단으로만 남을 뿐 보호의 언어로 기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고용허가제라는 ‘법’은 갖추어졌으나, 그 법이 새벽 봉고차 안의 삶에까지 온전히 닿았는지는 여전히 물어야 할 질문으로 남아 있다.
독일은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초빙노동자’라는 단어를 버리고 ‘이주 배경을 가진 시민’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아직도 그 거리의 봉합을 끝내지 못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그 단어조차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이른 시점에 서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누구를 새벽에 태우고 있는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님과 상인 사이에 신뢰가 쌓이던 재래시장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시장 좌판 위에서 형성되던 미소와 신뢰의 눈빛이, 왜 새벽 다섯 시의 서늘한 공터에서는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 발길이 끊긴 농촌 들녘, 조선소 새벽 조회, 항구를 나서는 어선의 갑판을 떠올려본다.
2026년 현재 한국은 이미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히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겹치는 지금, 이민 정책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논의도 그만큼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이민 확대와 사회 통합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지점에, 지금 한국이 서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논쟁이 어느 방향으로 결론 나든, 새벽 봉고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노동력’으로만 볼 것인지, ‘이웃’으로도 볼 것인지의 문제는 통계나 정책 이전에 남아 있는 질문이다.
그날, 우리는 이 새벽을 어떤 이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 참고할 말씀: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 레위기 19:34
¹ 고용노동부, 「고용허가제(EPS) 운영 통계」, 2004~2024
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국인노동자」 항목
³ Max Frisch, 「Überfremdung」(1965) 관련 인용은 독일 이주사 연구에서 널리 재인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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