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려받은 국경
선택해야 할 평화
2026.07.20 · 역사·철학 (한국사 시리즈 · 백제)
태자로 44년, 그리고 전쟁을 물려받다
한 나라의 왕이 죽으면, 그 나라가 하던 싸움까지 함께 상속된다. 77년, 백제의 다루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훗날 기루왕(己婁王)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즉위는 조금 이상하다.
그는 33년에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44년을 태자로 살다가 왕이 된 것이다.
44년이라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후대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재위 연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년의 정확성과 별개로, 이 기록이 보여주는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 기루왕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싸움을 물려받은 왕이었다는 것.
삼국사기는 그가 즉위한 뒤에도 한동안 아버지 다루왕 후반부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의 변경을 압박했다고 전한다. 특별한 명분이 새로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은 낡아 가는데, 국경의 마찰만 관성으로 지속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국경 반대편, 신라에서도 같은 시기 탈해 이사금에서 파사 이사금으로 이어지는 초기 왕권 강화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앞선 글에서 다룬 낙동강 결전과 축성, 천도의 시대다.
즉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서 벌어진 것은 어느 한쪽의 정복 서사가 아니라, 두 개의 신생 왕권이 서로를 향해 관성적으로 무력을 확인하던 시간이었다고 읽을 수 있다.
같은 시간, 로마와 낙양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시기 세계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79년, 로마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죽고 아들 티투스가 즉위했다. 같은 해 베수비오 화산이 폼페이를 덮었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68~69년의 극심한 내전(“네 황제의 해”)을 딛고 겨우 권력을 잡은 신생 왕조였고, 콜로세움 건설은 바로 그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려는 사업이었다. 81년 즉위한 도미티아누스는 게르만·다키아 변경에서 끊임없이 군사 원정을 벌였다 — 정복의 필요보다, 새 황제가 권력을 증명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가 앞선 원정들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 후한(後漢)에서는 화제(和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해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 권력 기반을 다져야 했고, 서역 도호 반초(班超)는 91년 무렵 서역 원정을 통해 흔들리는 중앙 권위를 변경의 승리로 보강하고 있었다.
이 사료들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공통된 그림이 보인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도, 후한의 조정도, 백제의 기루왕도 —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 즉위 초기의 왕권이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무엇이었다는 점에서 같은 문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루왕의 경우 44년이라는 태자 시절 자체가 오히려 자기증명의 압박을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 잡은 왕권일수록, 대내외에 왕권의 건재함을 각인시켜야 할 심리적·정치적 부담이 한층 더 컸을지도 모른다. 국경의 충돌은 종종 침략의 논리가 아니라, 아직 굳어지지 않은 권력이 스스로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충돌은 선택이 아니라 관성이다
기루왕의 초기 대(對)신라 정책에서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105년이다. 삼국사기는 이 해에 그가 신라에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한다. 113년에는 사신까지 보낸다.
즉, 즉위 후 20여 년을 이어온 관성적 충돌이 어느 한순간 저절로 멈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화친을 청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비로소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이번 편의 핵심이다. 전쟁의 시작에는 흔히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에는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
처음 싸움을 시작한 세대의 명분은 사라진 지 오래고, 다음 세대는 그저 “원래 그래왔으니까” 국경을 밀어붙인다. 반대로 화친은 언제나 능동적인 선택이다. 관성은 저절로 꺾이지 않는다.
이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를 볼 때도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권력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청산과 반청산의 구도, 이른바 “대칭적 극단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치의 오래된 문법일지 모른다. 진영은 다를지언정 대립의 방식과 강도가 서로를 닮아가며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 현상이다. “우리의 목적은 정의롭다”는 각 진영의 확신 속에서, 정작 그 확신을 낳았던 본래의 불씨는 꺼진 채, 진영이라는 괴물이 스스로 몸집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만하다.
기루왕의 국경처럼, 정쟁 역시 처음의 이유를 잃은 뒤에도 관성만으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아직 청하지 않은 화친
기루왕이 105년에 화친을 청하기 전까지, 백제와 신라의 변경은 약 30년 동안 이렇다 할 명분 없이 충돌을 거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30년 동안 무엇이 진짜로 지켜졌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관성을 끊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결정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삭도 비슷한 시간을 지났다. 그는 우물을 팔 때마다 목자들과 다투어야 했으나, 두 차례 양보한 끝에야 분쟁 없는 우물에 이르러 그곳을 “르호봇” — 넓힌 곳 — 이라 이름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물을 넓힌 것은 승리가 아니라 양보였다. 기루왕의 105년도, 이삭의 르호봇도, 같은 방식으로 관성을 끊는다 — 상대를 꺾어서가 아니라, 먼저 손을 내밀어서.
지금 우리가 마주한 국경, 혹은 진영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아직, 105년의 그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몇 년째 같은 국경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신라가 62년부터 108년까지 팽창해 가는 과정을 일곱 편에 걸쳐 살펴보았다. 이번 편의 백제는 바로 그 신라를 국경 너머에서 마주하고 있던 상대다.
[2부] 팽창기 — 신라편 전체
- 최초의 신라-백제 충돌 (62년)
- 금궤의 정치학 (65년)
- 낙동강 주도권 결전 (77년)
- 검소한 왕이 민심을 얻는 방식 (80년)
- 성을 쌓는다는 것 (87년)
- 수도를 옮긴다는 것 (101년)
- 신라식 팽창의 시작 (108년)
* 참고할 말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 로마서 12:18
각주
1. 백제 3대 왕 기루왕의 즉위(77년)와 초기 대신라 정책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근거한다. 삼국사기 초기 백제·신라 기년은 재위 기간이 부자연스럽게 길게 기록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어 학계에서 수정론이 제기되어 있으며, 본문의 연도는 이러한 사료적 한계를 전제로 읽어야 한다.
2. 105년 화친 요청, 113년 견사 기록 역시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루왕조에 근거한다.
3. 79년 티투스 즉위, 콜로세움 건설, 81년 도미티아누스 즉위 이후의 변경 원정은 로마사 일반 연대기에 근거한다.
4. 후한 화제 즉위와 반초의 서역 원정(91년 무렵)은 후한서 서역전 계통 기록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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