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절당한 악수, 시작된 칼
— 64년, 신라와 백제가 처음 칼을 맞대다
A.D. 63~64 · 한국사 시리즈 2-백제-①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믿었던 상대에게 발등을 찍힌 백제 태동기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백제가 먼저 손을 내밀 차례가 찾아온다. → 직전 편 읽기
짧고, 차가운 문장
서기 63년 10월, 백제 다루왕(多婁王)은 국경을 낭자곡성(娘子谷城, 지금의 청주)까지 넓힌 뒤, 신라에 사신을 보내 회동을 청한다.
이를 순진한 호의로만 보기는 어렵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각자의 영역을 확장하던 중 충돌 직전의 전선(戰線)에서 마주쳤다. 양국 모두 야심 찬 신흥 세력이었던 셈이다. 국경을 맞댄 상태에서 먼저 만남을 청한다는 것은 — 무력 대신 외교라는 수단을 시험해 보겠다는, 계산된 포석(布石)에 가까웠다.
신라의 왕은 탈해 이사금(脫解 泥師今)이었다. 《삼국사기》는 이 장면을 냉정하리만치 짧게 기록한다. “신라왕이 응하지 않았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이다. 이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경계(警戒)였는지, 무시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치적 계산이었는지 — 그 답은 역사가 남기지 않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1세기 전후)의 연대와 지명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신중론도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러나 이 기록이 보여주는 관계의 원형 — 청(請)과 거절, 그리고 뒤이은 무력 — 은 그 자체로 되짚어볼 가치가 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거절당한 손길은, 정확히 열 달 뒤 칼이 되어 돌아왔다.
64년 8월, 백제는 처음으로 군사를 신라 땅으로 보낸다. 목표는 와산성(蛙山城). 결과는 실패였다. 두 달 뒤인 10월, 백제는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탈해 이사금이 보낸 기병 2천 명에게 대패한다.
이것이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와 백제의 첫 무력 충돌이다. 그리고 이후 5백 년간 이어질 두 나라 관계의 원형이었다.
같은 해, 로마와 파르티아는 다른 선택을 했다
같은 해인 63년, 지구 반대편에서는 대등한 두 제국이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로마와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의 왕위를 두고 5년 가까이(58~63년) 전쟁을 벌였다. 초반에는 로마 장군 코르불로(Corbulo)가 우위를 점했으나, 62년 로마군이 란데이아(Rhandeia)에서 포위되어 항복하며 전세가 뒤집혔다.1 이 시점에서 양측이 택한 것은 전면전의 확대가 아니라 협상이었다. 63년, 파르티아는 사절을 로마로 보내 평화 조건을 논의했고, 그 결과 파르티아 왕족 티리다테스(Tiridates)가 아르메니아 왕위를 유지하되 로마 황제에게서 왕관을 받는 절충안 — 이른바 ‘란데이아 화친(Peace of Rhandeia)’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이 협상이 대등한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그것도 한쪽(파르티아)이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한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힘의 우위를 가진 쪽도 전쟁을 이어가는 대신 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같은 해, 한반도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제가 내민 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열 달 뒤 무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63년, 대륙의 양쪽 끝에서 두 개의 대등한 세력이 각자의 갈림길에 섰다. 한쪽은 협상을 선택했고, 다른 한쪽은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차이는 이후의 시간을 갈랐다. 로마와 파르티아의 화친 이후, 두 제국 사이에는 반세기 가까이 대규모 무력 충돌이 재발하지 않았다고 학계는 본다.3 백제와 신라의 거절은, 뒤에서 살펴보듯 정반대의 길을 열었다.
측은지심과 자연상태 — 맹자와 홉스가 갈라서는 지점
맹자(孟子)는 인간에게 타인을 향한 선한 마음이 본래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惻隱之心,仁之端也。
(측은지심,인지단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시작이다.”
— 맹자(孟子),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편4
다루왕의 회동 제안을 맹자식의 순수한 측은지심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바로 직전에 국경을 넓힌 상태였고, 이는 신라 입장에서 명백한 군사적 압박으로 읽힐 수 있었다. 다루왕의 행동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 사회가 무력이 아닌 대화로도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낙관론적 입장을 대변하는 대조군으로 맹자를 세워두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낙관이 통하려면, 상대 역시 같은 신호를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데 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정반대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어떠한 계약이나 제도로도 뒷받침되지 않은 관계란, 본질적으로 전쟁 상태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험악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그는 적었다.5
63년의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이 둘을 잇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조약도, 혼인 동맹도, 공식적인 외교 관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한쪽의 절제된 제스처와, 그것을 판단할 근거가 전혀 없는 다른 한쪽의 경계심만 있었을 뿐이다. 선의는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제도가 없는 선의는 상대에게 다른 의도로 읽힐 수 있다.
관산성으로 이어진 불신의 비용
63년의 거절과 64년의 칼은 그해로 끝나지 않았다.
66년, 백제는 와산성을 다시 빼앗아 수비병 2백을 두었지만 곧 신라에게 재탈환당한다. 70년, 74년, 75년, 76년 — 같은 성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충돌이 10년 넘게 반복된다.6 이 원형은 시간이 지나며 규모를 키운다. 500년 가까이 지난 554년, 백제 성왕(聖王)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스스로 전사한다.7 두 나라 관계의 첫 장에 쓰인 것이 ‘거절’이었다는 사실이, 그 마지막까지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63년의 청이 수용되었다면, 이후 5백 년에 걸친 양국의 역사가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뢰가 거절당했을 때 공동체가 치르는 비용은, 고대에만 있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국가와 정치 공동체가 보내는 작은 신호 — 대화의 요청이든, 절차적 신뢰의 표시든 — 가 방치되거나 거부될 때, 그 공백은 시간이 지나 반드시 더 큰 불신의 비용으로 돌아온다. 지금 한국 정치를 가득 채운 진영 간의 대화 단절과 상호 불신 역시, 크게 보면 이 오래된 불신의 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언제나 더 날카로운 무언가가 대신 들어선다 — 그것이 63년의 칼이든, 오늘의 정쟁이든. 63년 신라가 침묵으로 답했을 때, 그 침묵의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침묵이 남긴 결과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은 신뢰는 한순간의 오해로도 무너지며, 무너진 신뢰는 반드시 누군가의 대가를 요구한다.
청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역사는 종종 전쟁을 침략자의 야심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63년과 64년의 기록을 나란히 놓고 보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전쟁 이전에는 언제나 청(請)이 있었다. 손을 내미는 순간이, 거절당하는 순간이, 그리고 그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한 쪽이 다른 언어로 — 무력으로 — 다시 말을 거는 순간이.
다루왕이 낭자곡성까지 국경을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정확히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거절당한 뒤 백제가 선택한 것은 결국 무력이었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이 장면에서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내밀고 있는 손은, 상대에게 어떤 침묵으로 돌아오고 있는가.
* 참고할 말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 로마서 12:18
각주 및 출처
1 Cornelius Tacitus, Annals, Book XV, 10–17. — 62년 로마 장군 카에세니우스 파에투스(Caesennius Paetus)가 란데이아에서 파르티아군에 포위되어 항복한 기록.
2 Cornelius Tacitus, Annals, Book XV, 24–31; Cassius Dio, Roman History, 62.20–23. — 63년 란데이아 화친 성립 및 조건에 관한 기록. 실제 대관식은 66년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3 관련 연구는 네로~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약 50년)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대규모 전면전이 재발하지 않았다고 본다(UAB 대학원 논문 “Nero’s Eastern Policy and the Peace of Rhandeia” 참고). 이는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며 절대적 수치는 아니다.
4 맹자(孟子), 《맹자》 〈공손추상〉편.
5 Thomas Hobbes, Leviathan (1651), Part I, Chapter 13. — 본문 인용은 원문 “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의 취지를 옮긴 것으로, 특정 번역본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6 김부식,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다루왕 39·43·47·48·49년 조.
7 김부식,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성왕 32년 조 — 관산성 전투 및 성왕 전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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