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권은 왜 항상 이동하는가
투키디데스 함정, 바다의 버전
2026.09.08 · 바다
항공모함 세 척, 그리고 조선소의 불 꺼진 야간 근무
2026년 현재, 중국은 랴오닝함·산둥함·푸젠함, 세 척의 항공모함을 실전 배치했다.1 십 년 전만 해도 랴오닝함 한 척조차 온전한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던 나라다.
더 눈에 띄는 숫자는 따로 있다. 미국 해군 정보국이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 능력은 미국의 수백 배 규모로 벌어져 있다(수치는 평가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1
반면 미국 쪽 사정은 다르다. 노후 함정의 정비가 밀리고, 조선소 인력은 줄었으며, 새 함정을 진수하는 속도는 예산 계획을 계속 밑돈다.2
이 대비는 단순한 군비 경쟁 뉴스로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조금 멀리서 보면, 낯익은 그림이 하나 겹쳐진다.
바다의 지배자는 한 번도 영원했던 적이 없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세계의 물자와 식량을 실어나르던 대영제국의 식탁을 실제로 차린 손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식탁이 300년 가까이 차려질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하나였다 — 그 배들이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다를 오갈 수 있었다는 것.
그 전제, 즉 ‘바다를 지배하는 자리’ 자체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지는 않았다.
패권이 바뀌던 밤들
1588년 8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자신 있게 띄운 130여 척의 ‘무적함대(Armada)’는 영국 해협의 좁은 물목에서 좌초되듯 무너졌다. 야음을 틈타 투입된 영국의 화공선이 밀집 대형 사이로 불을 지르자 함대는 대열을 잃고 흩어졌고, 뒤이어 몰아친 폭풍우가 북해로 밀려난 함선들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까지 떠내려 보내며 전력의 상당수를 삼켰다.3 무적(無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유럽 최강으로 불리던 함대가 단 몇 주 만에 절반 가까운 배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 패배가 곧바로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스페인에는 아직 남미 포토시 은광에서 매년 실려 오는 막대한 은이 있었고, 그 은을 밑천 삼아 17세기 중반까지도 지중해와 대서양 양쪽에서 여전히 강력한 함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간판이 꺾인 뒤에도, 그 간판을 지탱해 온 곳간은 반세기 넘게 비지 않았던 셈이다.
스페인을 정작 흔들었던 것은 한 번의 패배라기보다 훨씬 조용하고 긴 싸움이었다. 1568년, 스페인 왕실의 통치를 받던 네덜란드 북부 7개 주가 반란을 일으키며 시작된 이른바 ’80년 전쟁’은, 전장에서의 승패보다 누가 무역과 자본을 더 효율적으로 조직하는가의 싸움에 가까웠다.4
그 싸움의 무기는 1602년 3월 설립된 동인도회사(VOC)였다. 여러 상인의 자본을 하나로 모아 주식으로 나눠 갖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구조였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위험한 원양 무역선단을 이 회사가 대신 꾸렸고, 필요하면 자체 군대를 두고 조약까지 맺을 수 있는 권한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았다. 국가가 못 하던 일을 회사가 대신 떠맡은 셈이다.
그 자본이 모이는 곳이 암스테르담이었다. VOC 주식이 거래되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신용과 보험, 환어음이 도시 하나에 집중되면서, 스페인이 무력으로 지키려던 무역로의 실제 자금줄은 이미 이 도시로 옮겨가 있었다. 1648년 1월 뮌스터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뒤늦게 ‘공식’ 인정되었을 무렵, 세계 해상 무역의 실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암스테르담의 것이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진짜 정점은 오히려 위기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1667년 6월,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 어귀 메드웨이까지 진입해 영국 해군을 정박한 채로 불태운 사건은 네덜란드 해군력의 최고 전성기를 보여준 장면이었다.5
그러나 이 굴욕은 역설적으로 영국의 반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1688년 11월, 잉글랜드 의회가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 대신 개신교도인 네덜란드 총독 오라녀공 빌럼을 새 왕으로 불러들이면서 이른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왕위뿐 아니라, 빌럼과 함께 그를 보좌하던 네덜란드 출신 금융가와 관료들, 그리고 그들이 쓰던 통치 기법까지 통째로 영국에 상륙한 사건이었다.
이들이 가져온 것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나랏빚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그때까지 유럽의 왕들은 전쟁 자금이 필요하면 왕 개인의 신용으로 돈을 빌렸고, 왕이 파산하거나 죽으면 그 빚도 함께 흔들렸다. 반면 네덜란드는 국가 자체가 채권을 발행하고 의회가 그 상환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왕 한 사람의 신용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신용으로 돈을 빌리는 체계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이 방식이 영국에 이식된 결과물이 1694년 7월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이다.6 국가가 안정적으로, 그것도 낮은 이자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영국은 이후 백 년 넘게 이어질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함대를 짓고 유지할 재정 여력을 확보했다.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면서, 이후 한 세기 넘게 이어질 ‘팍스 브리태니카’의 조건이 완성되었다.7 그 함대의 뒤에는, 전투 이전에 이미 자리 잡은 이 조용한 금융 개혁이 있었던 셈이다.
영국의 자리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1941년 12월 진주만에서 미 태평양 함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지 불과 반년 뒤인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8
이후 80여 년, 태평양과 대서양의 질서는 미국 해군을 중심으로 짜여 왔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 바다의 주인은 평균 백 년을 조금 넘기고 바뀌었다. 그 교체는 매번 정면충돌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제도와 산업의 틈에서 시작되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노자의 물
기원전 5세기,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9
τὴν πόλεμον ἀναγκαίαν ἐποίησε
(텐 폴레몬 아낭카이안 에포이에세)
“아테네의 성장과 그것이 스파르타에 안긴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 문장은 오늘날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려 나온다. 부상하는 세력과 기존 패권 세력이 서로에 대한 공포로 인해 충돌로 떠밀려 간다는 구조는, 2,400년 전 에게해에서든 오늘의 남중국해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은 논리로 읽힐 수 있다.
동양에서는 노자가 바다 자체의 속성을 통해 유사한 통찰에 이른다.10
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強者莫之能勝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막지능승)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함에 있어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없다.”
여기서 ‘물’을 단순한 은유를 넘어 실체로 풀이해보면 이 문장의 의미는 한층 명확해진다. 수면 아래 자리한 조선소의 생산 능력과 산업 인프라는 노자가 비유한 ‘물’의 속성과 닮아 있다. 항공모함이라는 단단한 함선이 바다 위에서 위용을 뽐내는 동안, 그 함선을 매년 몇 척씩 새로 건조할 수 있는가 하는 조용한 역량이 수면 밑에서 판도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세를 꺾은 것도, 대영제국의 조선소를 앞지른 것도 단 한 번의 정면충돌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제도와 생산력의 틈으로 오랫동안 스며든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규칙
역사가 오백 년 동안 다섯 번 반복해 보여준 사실은 명확하다. 패권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이 패턴은 이미 다섯 번의 교체를 통해 반복 검증되었다.
다만 그 다음 질문 — 지금 이 순간이 정확히 어느 시점의 이동인지, 그 이동이 평화롭게 끝날지 충돌로 끝날지 — 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 질문 앞에서는 역사도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오늘의 항공모함 세 척과 조선소의 숫자가 다음 백 년의 주인을 가리키는 신호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 균형이 재편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인지는, 지금 시점에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바다 위에서 ‘영원한 지배자’라는 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실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누구의 차례인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승자를 점치는 자리가 아니다. 다만 묻는다 — 지금 이 바다 위에서, 우리는 어느 함대의 편에 서 있다고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지난 다섯 번의 교체 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믿음과 정말 다른가.
다음 교체 역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의 문턱 앞까지 찾아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오만함에 빠져 거대함만을 신봉할 것인가, 아니면 물처럼 소리 없이 스며드는 변화의 틈을 먼저 읽어낼 것인가 — 지난 다섯 번의 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 참고할 말씀: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시며’ — 다니엘 2:21
각주
1. 중국 해군 항공모함 3척(랴오닝함·산둥함·푸젠함) 실전 배치 및 조선 능력 격차, 2026년 8월 보도 종합
2. 미국 해군 조선·정비 지연 관련, 다수 군사 분석 보도 종합
3. 스페인 무적함대(Spanish Armada) 패퇴, 1588년 8월
4.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설립, 1602년 3월 / 80년 전쟁, 1568~1648년 / 뮌스터 조약, 1648년 1월
5. 메드웨이 습격(Raid on the Medway), 1667년 6월
6. 명예혁명, 1688년 11월 / 잉글랜드은행 설립, 1694년 7월
7.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년 10월
8. 진주만 공습, 1941년 12월 /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9.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아테네·스파르타 충돌 원인 분석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 함정’ 개념으로 현대에 재조명)
10. 『노자』 도덕경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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