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은 왜 형제부터 지우는가 — 중천왕의 즉위와 세 번의 숙청
즉위 첫 해, 형제를 벤 왕. 같은 해 대륙 건너에서도 같은 칼이 움직이고 있었다.
2026.08.12 · 역사·한국사
즉위 첫 해, 왕이 가장 먼저 벤 것
248년, 고구려 12대 왕 중천왕이 즉위했다. 이름은 연불(然弗), 224년생, 스물넷의 나이였다.
그런데 즉위 그해 음력 11월, 왕이 가장 먼저 처리한 일은 외적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생 예물(預物)과 사구(奢句)였다.
두 왕자는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했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해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새 왕의 첫 정치적 행위가 축제도, 개혁도 아닌 형제의 처형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미리 말해준다.
고구려는 이미 고국천왕대를 거치며 부자 상속 체제로 전환된 뒤였으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근친 왕족들의 잠재적 야심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제도를 뒷받침할 힘은 매번 새로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잔혹한 옛 왕조의 일화”로 읽고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 하필 즉위 직후였는가. 왜 하필 형제였는가. 그리고 이 패턴은 정말 고구려에서 끝났는가.
같은 해, 대륙 건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천왕이 형제를 처형하기 불과 몇 달 전, 압록강 건너 위나라 조정에서는 다른 종류의 숙청이 준비되고 있었다. 249년,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의(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정적 조상(曹爽) 일파를 제거한 이른바 고평릉(高平陵) 사건이다. 당시 어린 황제를 함께 보좌하던 공동 섭정 조상(曹爽)이 황제를 모시고 선제의 능(高平陵)에 참배하러 도성을 비운 틈을 타, 병권을 쥔 사마의가 군사를 움직여 도성을 장악하고 조상 일파를 숙청한 것이다. 조씨 황실의 외피는 그대로 둔 채, 실질 권력은 사마씨 가문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 사건은 훗날 위나라가 진(晉)나라로 대체되는 출발점이 된다.
두 사건은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거의 맞닿아 있다. 하나는 왕실 내부에서 형제를 겨눈 칼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하가 황실을 겨눈 칼이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문법은 같았다. 권력이 재편되는 순간, 가장 먼저 제거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 권력을 나눠 가질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중천왕의 통치는 이후로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250년(재위 3년), 왕은 국상(國相) 명림어수(明臨於漱)에게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해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맡겼다. 신하의 권한을 키워서라도 왕실 내부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251년(재위 4년)에는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모함하다 발각되어 가죽 주머니(革囊)에 담긴 채 서해에 던져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표면적으로는 후궁들의 투기극이지만, 그 이면에는 왕후를 배출한 연나부(椽那部)와 세력 확대를 노리던 관나부(貫那部) 사이의 뿌리 깊은 대립이 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왕의 침소조차 부(部) 세력 간 대리전의 무대였던 셈이다.
254년 명림어수가 죽자 왕은 음우(陰友)를 새 국상으로 세웠고, 255년에는 왕자 약로(藥盧)를 태자로 책봉해 후계 구도를 서둘러 확정했다. 그리고 259년(재위 12년), 위나라 장수 위지형(尉遲兄)이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오자 왕은 직접 정예 기병 오천을 이끌고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다. 형제를 벤 왕이, 외척을 수장시킨 왕이, 결국 외적 앞에서는 스스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270년,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는 별다른 설명 없이 짧게 기록한다. 무엇으로 죽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태자 약로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곧 서천왕이다.
법가와 마키아벨리, 서로 다른 시대의 같은 조언
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
(포법처세즉치, 배법거세즉란)
“법을 지니고 권세에 자리하면 다스려지고, 법을 등지고 권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 한비자(韓非子)
한비자에게 권력이란 도덕적 정당성보다 먼저 확보되어야 하는 물리적 조건이었다. 법과 세(勢)를 함께 쥐지 못한 통치자는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져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그는 새로 권좌에 오른 군주일수록 위해가 될 수 있는 자들을 초기에, 한꺼번에 정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훗날 조금씩 처벌을 이어가는 방식은 원한만 오래 남길 뿐이라는 논리였다. 중천왕의 즉위 초 숙청과 사마의의 고평릉 정변은 시대도, 문명권도 다르지만 이 조언을 거의 그대로 따른 사례로 읽힐 수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안정이라는 이름의 유혈, 그 반복되는 구조
중천왕의 23년은 표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한 내부 안정”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안정의 재료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형제의 처형(248), 신하 권한의 확대(250), 후궁의 수장(251), 후계자의 조기 확정(255)이라는 네 개의 사건이 남는다. 권력은 안정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정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먼저 유혈을 치른다.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같은 시기 위나라의 사마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적을 제거한 뒤에야 “천하가 안정되었다”는 서사가 쓰였다. 안정은 명확한 결과라기보다, 숙청이 일단락된 뒤 부여되는 이름표에 가까웠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압록강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문법의 권력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시대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선명한 패턴이다.
우리는 지금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는가
중천왕이 형제를 벤 것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였다고 삼국사기는 담담히 기록한다. 그러나 담담한 기록 뒤에는 언제나 지워진 이름들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안정만을 기억하고, 그 안정이 치른 대가는 각주로 남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또한 이 질문에서 온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새로운 권력이 자리를 잡을 때마다 우리는 묻게 된다 — 지금 이 자리다툼과 세력 재편이 정말 국가를 위한 안정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안정이라는 이름의 숙청’을 반복하고 있는가. 1,800년 전의 국상과 후궁, 왕자들의 자리다툼이 오늘의 뉴스와 낯설지 않게 겹쳐 보인다면, 우리가 여전히 유사한 구조적 질문 앞에 서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옛 경구처럼, 안정을 위해 유혈을 택했던 권력이 끝내 스스로의 거만함에 무너지는 일 또한 역사가 되풀이해 증명해온 바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동천왕이 위나라의 침공 앞에서 국내성을 잃고도 백성과 함께 저항했던 순간을 살펴보았다. 그 아들 중천왕은 같은 위협 앞에서 내부를 먼저 정돈하는 또 다른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위기 앞에서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을 다시 보게 된다.
* 참고할 말씀: ‘무릇 그의 행하심이 진실하고 그의 길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 다니엘 4:37
1. 중천왕의 즉위, 형제 예물·사구의 모반과 처형(248년 11월)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조
2. 국상 명림어수의 내외병마사 겸임(250년, 재위 3년), 관나부인의 서해 수장(251년, 재위 4년), 명림어수 사망 및 음우 임명(254년), 태자 약로 책봉(255년)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조
3. 위나라 장수 위지형(尉遲兄)의 침공과 양맥 전투(259년, 재위 12년)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조
4. 사마의의 고평릉 정변(249년, 정시 10년) — 「삼국지」 위서 제하후조전
5.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