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리 길을 왕이 직접 간 까닭 — 태조왕의 책성 순행
삼국의 시간 2-고구려-⑧ | 나라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러 간 왕
2026년 6월 · 역사·한국사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서기 74년 가을, 태조왕이 환나부의 설유를 보내 주나를 정벌하고 패배한 왕자에게 칼 대신 고추가(古鄒加) 관등을 내린 장면을 살폈다. 위임과 포용 — 두 선택이 말하는 권력의 구조, 그리고 그 끝에 남은 질문이었다. ☞ 왕이 직접 가지 않는다는 것 — 고구려 태조왕의 위임, 서기 74년
94년, 왕이 동쪽으로 출발하다
94년, 태조왕은 동쪽으로 갔다.
전쟁이 아니었다. 설유를 보내던 방식도, 달가를 내보내던 방식도 아니었다. 왕이 직접 말에 올랐다. 목적지는 책성(柵城) — 두만강 유역, 고구려의 동쪽 끝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2년 기록은 짧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2년 (서기 94년)
“봄 2월에 왕이 책성으로 순행하였다.”1
원문: 春二月,王巡柵城.
그리고 98년, 돌아오는 기록이 남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6년 (서기 98년)
“겨울 10월에 왕이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관대한 형벌을 베풀었다.”2
원문: 冬十月,王自柵城還,所過存問百姓,曲赦囚徒.
두 문장 사이에 4년이 있다. 《삼국사기》는 그 사이를 채우지 않는다. 태조왕이 그 긴 시간 동안 책성에 줄곧 머물렀는지, 아니면 동방 국경을 여러 차례 순행하며 경영한 시간의 총합이 이렇게 기록된 것인지 — 사료는 침묵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다. 94년 봄에 떠난 왕의 발걸음이 98년 겨울에야 수도로 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무게만큼의 시간이 동쪽 끝에 쏟아졌다는 것이다.
앞선 편에서 우리는 물었다. 위임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이 먼저인가, 포용할 수 있을 만큼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먼저인가. ⑧편은 그 질문에 하나의 장면으로 답한다. 위임으로 땅을 넓힌 왕은, 그 다음에 직접 그 땅을 걸었다.
책성이 있는 자리 — 천리 대장정의 의미
책성이 어디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한 내륙 국가에 가까웠다. 56년 동옥저를 복속했고, 68년 갈사국을 병합했으며, 72년과 74년에 조나·주나를 차례로 정복했다. 그 방향은 줄곧 동쪽이었다. 책성은 그 동진(東進)의 최전선이었다.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珲春) 일대로 비정되는 이 지역은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드는 길목이다.3
수도 국내성(國內城)에서 책성까지는 험준한 산과 강을 거쳐야 하는 천리길이었다. 제목의 ‘600리’는 이 대장정을 상징하는 표현이다.4 말을 달려도 열흘이 훌쩍 넘는 길. 왕의 행렬이라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태조왕이 출발했을 때,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이 그 끝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지도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도에는 사람이 없다. 변경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왕의 이름이 그곳까지 닿아 있는지 — 그것은 직접 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직접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순행이란 무엇인가 — 동서양이 같은 질문 앞에 서다
왕의 순행은 고구려만의 언어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한 뒤 다섯 차례 이상 순행을 떠났다. 기원전 221년부터 210년까지, 그는 태산(泰山)에 올라 봉선(封禪)을 거행했고 동쪽 해안까지 나아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기(史記)》는 각 지역에 세워진 각석(刻石)을 기록한다. 비석에는 황제의 덕을 새겼지만, 실제로 새긴 것은 “이 땅에 황제의 눈이 닿았다”는 사실이었다.5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재위 서기 117~138년)가 같은 충동을 제국 규모로 실행했다. 재위 21년 동안 그는 제국의 거의 모든 속주를 직접 방문했다. 브리타니아에서는 성벽을 쌓게 했고, 아테네에서는 건축을 독려했으며,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다닌 길은 더 이상의 팽창이 아니라 이미 넓어진 제국의 국경을 고착시키고 내실을 다지는 선이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유지 — 그것이 하드리아누스가 두 발로 새긴 전략이었다.6 태조왕의 걸음 역시 같은 논리 위에 있다. 정복의 시대를 지나 통합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힐 수 있다.
맹자는 이것을 다른 언어로 말했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君之視臣如手足,則臣視君如腹心。
군지시신여수족,즉신시군여복심。
“임금이 신하를 손과 발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배와 심장처럼 여긴다.”7
책성의 백성들이 태조왕을 배와 심장처럼 여기려면, 태조왕이 먼저 그들을 손과 발처럼 여겨야 한다. 순행은 그 관계를 물리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였다. 왕이 천리 길 끝까지 온다는 것은, 변경의 백성들에게 당신들도 이 나라의 일부라는 신호를 몸으로 보내는 것이다.
98년 겨울 — 돌아오는 왕이 한 일
《삼국사기》는 귀환 장면에서 한 가지를 더 기록한다.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관대한 형벌을 베풀었다(所過存問百姓,曲赦囚徒).” 이 짧은 문장 안에 두 개의 행위가 있다. 위로(存問)와 사면(曲赦).
위로는 말이다. 사면은 구조의 변경이다.
전근대 국가에서 왕의 사면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다. 지역 관리들의 판결을 왕이 직접 재검토한다는 의미다. 변경의 형사(刑事) 행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억울한 자가 없는지를 왕이 스스로 확인하겠다는 선언이다. 사면은 시혜가 아니라 감찰이었다. 그리고 그 감찰을 왕이 직접 수행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 17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덕경(道德經)》 17장 — 노자(老子)
太上,下知有之。
태상,하지유지。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안다.”8
이 구절은 종종 개입하지 않는 지도자를 찬양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있다는 것만을 안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먼저 그 존재가 백성들에게 닿아야 한다. 책성의 백성들이 태조왕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태조왕은 직접 책성까지 가야 했다. 존재를 각인시키는 행위 없이는, 노자의 이상적 통치도 시작되지 않는다.
팽창과 통합 — 태조왕 시기가 보여주는 하나의 패턴
56년부터 98년까지, 태조왕 재위 전반부의 궤적을 한 줄로 그리면 이렇다.
동옥저를 복속하고(56년), 갈사국을 병합하며 도두에게 우태를 수여하고(68년), 조나·주나를 차례로 정복하면서 달가·설유를 내세우고 을음에게 고추가를 내렸다(72·74년). 그리고 94년, 왕이 직접 그 동쪽 끝까지 걸어갔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과 그 영토를 실질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다른 과제다. 전자는 군사력의 문제이고, 후자는 정치력의 문제다. 태조왕은 두 과제를 순차적으로, 그러나 연속적으로 수행했다. 대리인을 보내는 것과 직접 가는 것 — 이 두 행위는 모순이 아니다. 위임은 구조의 효율을 위한 선택이고, 순행은 그 구조가 사람을 담고 있는지 확인하는 행위다.
진시황의 봉선 순행과 하드리아누스의 속주 방문이 같은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 — 이것은 권력의 팽창이 언제나 같은 질문 앞에 놓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얼마나 넓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 나라의 일부로 느끼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순행이었다.
왕이 그 시간을 동쪽 끝에 쏟아부은 이유
98년 겨울, 돌아오는 왕의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였을 것이다.
그들이 왕을 본 것은 처음이었을 수도 있다. 태조왕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왕의 순행은 무엇이었을까. 위로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 이 나라의 끝이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인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왕이 그 긴 시간을 동쪽 끝에 쏟는 동안, 수도 국내성에서는 누가 나라를 운영했는가. 《삼국사기》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도 나라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다. 바라보는 자는 묻는다 — 당신이 자리를 비워도 구조가 작동하는가. 그것이 태조왕이 94년 봄에 출발하기 전에 먼저 완성해야 했던 것이었다.
* 참고할 말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 창세기 28:15
1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42년(서기 94년) 조. 원문: “春二月,王巡柵城.” 1145년 편찬.
2 같은 책, 태조대왕 46년(서기 98년) 조. 원문: “冬十月,王自柵城還,所過存問百姓,曲赦囚徒.”
3 책성(柵城)의 위치 비정: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珲春) 일대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다.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4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책성」 항목 참조. 다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으며, 훈춘설 외에 연길(延吉) 일대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4 전통 단위로 1리(里)는 약 400m이며, 국내성~책성 구간은 실제 지형 경로상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제목의 ‘600리’는 이 여정의 험난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했으며, 정확한 전통 단위 환산치로 제시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5 진시황의 순행과 각석(刻石):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봉선(封禪) 의례 및 태산·낭야·갈석 등 각지 각석 기록 수록. 기원전 109년경 편찬.
6 하드리아누스의 속주 순행과 팍스 로마나 전략: Aelius Spartianus, Historia Augusta, “Hadrian” (〈하드리아누스 전기〉). 서기 4세기 편찬. 재위 기간(117~138년) 동안의 속주 방문 기록. 참고: Anthony Birley, Hadrian: The Restless Emperor (Routledge, 1997), pp.118~140.
7 맹자(孟子), 《맹자》 〈이루 하(離婁下)〉. 원문: “君之視臣如手足,則臣視君如腹心。” 기원전 4세기~3세기경.
8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17장. 원문: “太上,下知有之。” 기원전 4세기경 성립 추정. ※ 이 인용은 사후적 해석 틀로 활용된 것임을 명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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