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직접 가지 않은 이유

왕이 직접 가지 않는다는 것 — 고구려 태조왕의 위임, 서기 74년

위임하는 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 설유를 보내고, 왕자에게 관등을 내리다

2026년 6월 · 역사·한국사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서기 72년 봄 2월, 태조왕이 관나부의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은 장면을 살폈다. 항복에는 유연하게, 저항에는 단호하게 — 두 결과의 대비 자체가 이후의 질서를 만든다는 패턴이었다. ☞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것 — 고구려 태조왕의 조나 정벌, 서기 72년

왕이 두 번 가지 않은 이유

2년이 지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22년 기록은 이렇게 쓰여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22년 (서기 74년)

“가을 8월에 왕이 환나부(桓那部)의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게 하여 그 왕자를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1

원문: 秋八月,王遣桓那部薛儒,伐朱那,虜其王子爲古鄒加.

72년의 조나 정벌은 태조왕이 직접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 관나부의 달가를 내보냈다. 74년의 주나 정벌에서는 환나부의 설유를 보냈다. 두 번 모두 왕이 직접 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정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72년은 봄 2월, 74년은 가을 8월이다.

전근대 국가에서 가을 원정은 선택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수확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병사들은 곧 밭으로 돌아가야 하는 농민이기도 하다. 조나 정벌이 농번기 직전이라는 정밀한 계절 감각을 보여주었다면, 주나 정벌의 8월은 다른 종류의 확신을 요구한다. 계절의 불리함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이번 정벌은 짧게 끝날 것이라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다는 뜻이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72년 조나 정벌 이후, 고구려의 위세는 이미 주변 소국들에게 각인된 상태였다.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 번 보여주었다. 두 번째 정벌은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움직였다.

달가와 설유 — 왕이 공을 나누는 방식

이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은 계절이 아니다. 누가 갔느냐다.

72년 조나 정벌은 관나부(貫那部)의 달가(達賈)가 이끌었다. 74년 주나 정벌은 환나부(桓那部)의 설유(薛儒)가 이끌었다. 고구려의 5부(部) 중 두 개의 서로 다른 부(部)가 각각 하나의 정벌을 맡은 것이다.2

이것은 군사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정복의 공(功)을 특정 부(部)에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하는 것, 그리하여 각 부(部)가 왕의 이름 아래서 자신의 몫을 갖도록 하는 것 — 그것은 내부 정치의 논리였다. 바깥을 향한 전쟁이 동시에 안을 향한 정치가 된다. 태조왕은 주나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복의 과정에서 환나부의 충성을 내부로부터 강화하는 구조를 동시에 작동시켰다.

왕이 직접 나서야만 결속되는 구조는 아직 왕권이 취약하다는 증거다. 대리인을 통해서도 왕의 명령이 관철된다는 것 — 그것이 권력이 내부를 향해 먼저 완성되었다는 신호다. 이 지점에서 당 태종이 수백 년 뒤 신하들에게 남긴 말이 이미 74년에 작동하고 있었다.

《정관정요(貞觀政要)》 권3, 〈군도(君道)〉 — 당 태종

夫欲攻人者,必先自治。

부욕공인자,필선자치。

“공격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3

바깥으로 향하는 칼이 서기 전에, 안의 위계가 먼저 선다. 환나부가 왕의 이름으로 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위계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임은 신뢰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완성을 증명하는 행위다.

고추가(古鄒加) — 칼 대신 관등을, 그 계산의 깊이

주나의 왕자 을음(乙音)은 사로잡혔다. 그리고 처형되지 않았다. 고추가(古鄒加)라는 관등을 받았다.4

이 선택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72년과 74년을 대비해야 한다. 조나의 왕은 사로잡혔고 그 이후 운명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 주나의 왕자는 사로잡혔고 고구려의 귀족이 되었다. 저항한 왕은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포섭된 왕자는 이름을 얻는다. 이 대비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다. 다음에 저항을 선택하려는 소국의 군주들이 읽어야 할 메시지.

고추가는 고구려 관등 체계에서 상위에 속하는 작위였다. 외부인에게 이 관등을 수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그를 고구려 지배 구조의 일부로 편입한다는 선언이었다. 을음은 고구려의 귀족이 됨으로써 주나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 고구려 안에서의 지위를 얻었다. 피정복자를 지배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 방식은 단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장기 충성을 설계하는 구조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계산이 작동하고 있었다.

서기 6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히스파니아의 모든 자유민에게 라틴 시민권(Latium)을 부여했다.5 플리니우스는 이것을 황제의 선물이라고 기록했지만, 그것은 선물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반란의 불씨를 품어온 히스파니아 속주의 유력자들을 로마 시민권 체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이 저항이 아닌 편입을 선택하도록 유인하는 구조적 설계였다. 시민권은 회유의 도구가 아니라 제국 질서를 내면화시키는 장치였다.

물론 고추가를 받은 을음과 라틴 시민권을 받은 히스파니아의 유력자들 사이에 어떤 교류도 없었다. 체급과 문명의 형태도 전혀 달랐다. 그러나 74년의 고구려와 69년의 로마는 ‘인간 사회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본질적인 원리’를 독립적으로 발견해 냈다. 저항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저항할 이유 자체를 제거하는 것, 즉 피정복자를 지배 구조의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다.

위임과 포섭 — 하나의 패턴이 말하는 것

74년 8월의 기록은 짧다. 그러나 이 짧은 기록 안에 두 개의 선택이 포개져 있다.

첫째, 태조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설유를 보냈다. 이것은 왕권이 대리인을 통해서도 관철될 만큼 내부가 정비되었다는 신호다.

둘째, 패배한 왕자에게 칼 대신 관등을 내렸다. 을음을 처형하는 대신 고추가로 삼았다. 이것은 팽창이 단순한 병합이 아니라 지배 구조의 확장으로 설계되고 있었다는 신호다.

한비자는 〈팔경(八經)〉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비자(韓非子)》 〈팔경(八經)〉

用人雖有智,必以法度量之。雖有巧,必以法度禁之。

용인수유지,필이법도량지。수유교,필이법도금지。

“사람을 쓸 때, 비록 지혜롭다 해도 반드시 법도로써 헤아려야 한다. 비록 재주가 있다 해도 반드시 법도로써 제어해야 한다.”6

설유는 왕의 이름 아래 움직였다. 을음은 고구려의 관등 아래 편입되었다. 태조왕의 두 선택은 모두 “법도” — 즉 구조와 위계 — 안에서 이루어졌다. 개인의 자질이 아닌, 구조 자체가 팽창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태조왕 시기를 통틀어 보면 이 패턴이 반복된다. 56년 동옥저 복속. 68년 갈사국 병합 — 도두에게 우태 수여. 72년 조나 정벌 — 달가 파견. 74년 주나 정벌 — 설유 파견, 을음에게 고추가 수여. 각각의 사건이 분리된 군사 행동처럼 보이지만, 거시적으로 읽으면 하나의 연속적 설계다. 왕 중심의 위계를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다시 내부로 강화해 나가는 나선형 구조.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

74년 8월, 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그리고 패배한 왕자에게 칼 대신 관등을 내렸다.

이 두 선택은 우연히 같은 해에 일어나지 않았다. 위임할 수 있을 만큼 안이 정비되었기에,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아니면 — 포용의 설계가 먼저 있었기에, 위임이 가능한 구조가 따라왔다.

어느 쪽이 먼저인가. 강해지면 포용할 수 있게 되는가. 아니면 포용할 줄 알기에 강해지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조직과 사회에서, 이 질문은 여전히 답이 없다. 위임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아직 안을 완성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포용할 구조를 설계하지 못한 것인가. 《삼국사기》는 결과만 기록했다.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다.


* 참고할 말씀: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 잠언 11:14


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22년(서기 74년) 조. 원문: “秋八月,王遣桓那部薛儒,伐朱那,虜其王子爲古鄒加.” 김부식(金富軾) 저, 1145년.

2 고구려 5부(部): 계루부(桂婁部)·연나부(涓那部)·순노부(順奴部)·관나부(貫那部)·환나부(桓那部).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 2004), 2장. ※ 72년 조나 정벌을 이끈 달가가 관나부, 74년 주나 정벌을 이끈 설유가 환나부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어, 왕이 정복의 공을 각 부(部)에 분산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삼국사기》 원문에는 ‘패자(沛者)’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조왕」 항목.

3 吳兢(오긍), 《貞觀政要(정관정요)》 권3, 〈君道(군도)〉, 기원후 8세기 초 편찬. ※ 이 구절은 당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에 수록된 것으로, 서기 74년의 태조왕이 이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의미가 아님. 동일한 구조적 원리가 시대와 문명을 달리하여 반복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비교적 인용임.

4 주나 왕자 을음(乙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조왕」 항목; 위키백과, 「태조대왕」. ※ 을음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원문에는 명시되지 않으며, 후대 관련 연구 및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이름이다. 고추가(古鄒加)는 고구려 관등 체계에서 왕족·외래 귀족에게 수여된 작위로, 지배 구조 편입의 형식적 표지로 기능했다.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3장 참조.

5 베스파시아누스의 히스파니아 라틴권(Latium) 부여: Pliny the Elder, Naturalis Historia, III.30. “Universae Hispaniae Vespasianus Imperator Augustus iactatum procellis rei publicae Latium tribuit.” 참고: A. N. Sherwin-White, The Roman Citizenship (Oxford, 1973), pp.237~250. ※ 이 조치는 서기 69~70년경으로 추정되며, 히스파니아의 라틴권 부여는 속주민을 로마 시민권 체계 안으로 단계적으로 편입시키는 구조적 장치였다.

6 한비자(韓非子), 《한비자》 〈팔경(八經)〉편. 원문: “用人雖有智,必以法度量之。雖有巧,必以法度禁之.” ※ 한비자(기원전 280~233년경), 전국시대 한(韓)나라 법가 사상가. 이 인용 역시 사후적 해석 틀로 활용된 것임을 명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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