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이름으로 쓰인 역사, 이름 없는 자들의 기록

왕의 이름으로 쓰인 역사, 이름 없는 자들의 기록

고구려·백제·신라, 700년의 전환기를 살아낸 보통 사람들

2026년 5월 · 역사 — 한국사 · Watchman


[ 광고 ]

B.C. 57년, 경주 분지의 여섯 촌장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37년 뒤 압록강 유역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고, 18년 뒤에는 한강 남쪽에서 온조가 백제의 기틀을 놓았다. 《삼국사기》는 이 건국 설화들을 왕의 시선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그 무렵 경주 분지의 논두렁을 맨발로 걷던 농민, 압록강 변에서 그물을 던지던 어부, 한강 남쪽에서 움집을 짓던 장인은 어떤 하루를 살고 있었는가.

역사는 종종 왕의 이름으로 쓰이지만, 그 왕조를 떠받친 것은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건국이라는 거대한 전환, 서민이 느낀 것은

부족 연맹에서 왕국으로의 전환은 지배층에게는 권력의 집중을 뜻했지만, 서민에게는 새로운 의무의 탄생을 뜻했다. 세금과 군역과 요역—이 세 가지가 이제 국가라는 이름 아래 공식화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A.D. 372년) 율령을 반포했다. 백제는 고이왕 27년(A.D. 260년) 16관등제와 공복제를 정비했다. 신라는 법흥왕 7년(A.D.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법제화했다.1

율령이 반포된다는 것은 문명의 성숙을 뜻하는 동시에, 국가가 처음으로 개인의 삶을 공식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서민들은 이제 무작위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봄에 빌리고 가을에 갚는 삶 — 진대법이 없었다면

서민의 일상에서 가장 큰 공포는 전쟁이 아니라 흉년이었다. 봄에 씨앗과 곡식이 바닥나면 부호나 귀족에게 빌릴 수밖에 없었고, 높은 이자는 가을 추수 이후에도 빚을 남겼다. 빚을 갚지 못한 농민은 자신이나 자식을 노비로 넘기는 ‘자매(自賣)’라는 절차를 밟았다. 국가로서는 납세자가 노비로 전락하는 것이 세수 손실이었고, 서민으로서는 신분의 추락이었다.

고구려 고국천왕 16년(A.D. 194년), 재상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賑貸法)이 시행되었다. 3월부터 7월 사이 굶주린 백성에게 관곡을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한 이 제도는, 《삼국사기》 고국천왕 본기에 “백성이 매우 기뻐했다(百姓大悅)”고 기록되어 있다.2 단 한 문장이지만, 그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봄마다 공포를 느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이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B.C. 2~1세기), 200년에 걸친 정복 전쟁이 역설적으로 로마 농민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장기 원정에 동원된 농민 병사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땅은 이미 대귀족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 대농장)에 흡수되어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프롤레타리아(proletarii)—재산 없이 자식만 낳는 자들—가 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B.C. 133년 공유지 점유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는 토지개혁법(Lex Sempronia Agraria)을 추진했다.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로 그는 그해 암살되었고, 10년 뒤 같은 길을 걸은 동생 가이우스도 B.C. 121년 같은 운명을 맞았다.3 개혁은 실패했고, 로마 농촌의 해체는 이후 공화정 붕괴의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강변 움집과 지중해의 포럼 광장은 수만 리 떨어져 있었지만, 빚에 무너지는 농민의 신음 소리는 같은 음조였다. 그리고 그 신음에 귀를 기울인 개혁자들이 기득권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결말도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진대법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을파소가 그라쿠스보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구려의 왕권이 귀족 연합보다 강했기 때문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자국민을 노예로 삼는 구조가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다.

성을 쌓는 손, 전쟁터로 가는 발

4~6세기는 삼국이 본격적으로 한강 유역을 두고 충돌하던 시기였다. 백제 근초고왕(4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4~5세기), 신라 진흥왕(6세기)이 각각 전성기를 열었다. 왕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뒤에는 이름 없는 서민 병사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병농일치 체제 아래 서민 남성은 평시에 농부, 전시에 병사였다. 전쟁이 없는 시기에도 성곽 축조, 궁실 건설, 관개 수로 공사에 무상으로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지린성 지안)과 환도성, 백제의 한성(풍납토성·몽촌토성 추정), 신라의 월성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그 성벽 안에 수천 명의 노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A.D. 357년 추정) 벽화에는 부엌에서 일하는 시녀들, 마구간을 정리하는 마부들이 묘사되어 있다. 지배층 무덤에 새겨진 그들의 모습은 당시 하층 서민의 노동이 얼마나 세분화되고 조직화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4


움집과 쪽구들, 그리고 잡곡밥 한 그릇

고분 벽화와 고고학 발굴 성과를 종합하면 이 시기 일반 서민의 주거는 반지하식 움집이 주류였다. 바닥을 60~90cm 정도 파고 네 벽을 흙과 나무로 세운 구조로, 단열성은 낮았다. 고구려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 대응해 방 한쪽 벽을 따라 불길이 지나가는 ‘쪽구들(편구들)’ 형태의 초기 온돌을 사용했다. 이것이 이후 한반도 주거 문화를 규정하는 온돌의 원형이다.5

식생활은 철저히 계층적이었다. 귀족 식탁에 쌀과 고기가 올라올 때, 서민들의 상에는 조·수수·피 같은 잡곡과 아욱국, 소금에 절인 채소가 전부였다. 단백질은 콩이나 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보충했다. 벼농사가 본격화되기 이전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는 쌀 자체가 귀했다.

고구려 귀족 복식이 소매가 넓고 긴 포(袍) 형태라면, 벽화 속 서민 남성은 통이 좁고 무릎 위까지 오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다. 활동성을 최우선으로 한 복식이었다.6


온달의 이야기가 왜 살아남았는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온달 이야기(6세기 말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대)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가난한 평민 온달이 무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다는 이 서사는, 무공(武功)이 서민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신분 상승의 통로였음을 반증한다. 역설적으로 이 이야기가 오래 기억된 것은, 그런 사례가 그만큼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7

골품제로 신분이 법제화된 신라에서는 그 통로조차 좁았다. 6두품 이하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법흥왕의 율령은 국가를 정비했지만, 동시에 불평등을 법으로 굳혔다.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A.D. 320~550년)가 신분 질서를 더욱 정교하게 성문화하고 있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 문명의 황금기로 불리지만, 그 찬란함의 이면에는 바르나(varna)와 자티(jati)로 이중화된 카스트 체계가 심화되고 있었다. 브라만 법학자들이 편찬한 다르마샤스트라(Dharmaśāstra) 문헌들은 이 시기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각 신분의 의무와 금기를 촘촘하게 규정했다. 불가촉천민(아스프리샤)의 존재가 법적으로 명문화된 것도 이 시기와 맞닿아 있다.8

신라의 골품제, 고구려·백제의 귀족 중심 관등제, 인도의 카스트 성문화는 같은 세기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불평등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법전 안에 가두는 작업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농경 국가가 일정 수준의 복잡성에 도달했을 때 필연적으로 거치는 경로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토착 신앙에서 불교로 — 서민의 마음이 이동한 방향

국가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서민들의 신앙 세계는 산신, 천신, 조상신에 대한 무속적 제의로 채워져 있었다.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 384년(침류왕 원년), 신라 527년(법흥왕 14년, 이차돈 순교) 순으로 불교가 공인되었다.9

지배층에게 불교는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이념적 도구였다. 그러나 서민에게 불교는 달랐다. “지금의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며, 지금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얻는다”는 업설(業說)과 윤회 사상은, 현세에서 구조적으로 바꿀 수 없는 불평등을 견뎌낼 심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것이 위안인지 체념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빠르게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종교가 민중의 고통을 달래는 수단이었는가, 아니면 민중 스스로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려 한 것이었는가.


[ 광고 ]

이름 없는 자들이 쌓은 것들

국가가 성장할수록 제도는 정교해지고, 제도가 정교해질수록 서민에 대한 국가의 요구도 정교해진다. 율령은 문명의 징표이지만, 동시에 수탈의 합법화이기도 했다. 진대법처럼 서민을 보호하는 제도가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지만, 그것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이전까지 보호가 없었음을 뜻한다.

이름 없는 농민이 쌓은 성곽, 이름 없는 병사가 치른 전쟁, 이름 없는 장인이 만든 기와—삼국의 역사는 이름 있는 자들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노동이었다.

바라보는 자는 묻는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각주 및 출처

1. 《삼국사기》(김부식 저, 1145년) — 소수림왕 본기 2년조, 고이왕 본기 27년조, 법흥왕 본기 7년조

2. 《삼국사기》 권16 고국천왕 본기 16년조

3. Plutarch, Parallel Lives, “Tiberius Gracchus”; Appian, Civil Wars, Book I

4.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2003

5. 주남철, 《한국 주거 건축》, 일지사, 1980

6.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7. 《삼국사기》 권45 열전 제5 온달조

8. Romila Thapar, Early India: From the Origins to AD 1300, Penguin Books, 2002; Patrick Olivelle, Dharmasūtras,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9. 《삼국사기》 — 소수림왕 본기 2년조, 침류왕 본기 원년조; 《삼국유사》 — 이차돈 순교 관련 기록


[ 광고 ]

* 참고할 말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니라’ — 시편 82:3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