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을 지배하는 자, 인간을 지배한다
— 성(城)을 쌓는다는 것의 정치학 · 서라벌 B.C. 37
2026년 6월 · 역사·한국사 · Watchman
한국사 시리즈 — 태동기 B.C. 2333 ~ A.D. 53 · 다섯 번째 이야기
도망자에서 왕이 된 자는 나라를 세웠다. 여섯 촌장의 합의로 왕이 된 자도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느슨한 연대는 국가가 될 수 없었다. 국가가 되려면 경계가 있어야 했고, 경계는 반드시 무언가를 쌓아야 그어진다. 사로국이 서라벌에 성을 쌓기 시작했을 때 — 신라의 정치는 비로소 공간 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무 울타리 하나가 세상을 나눈다
기원전 37년 전후, 서라벌(徐羅伐) 분지.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여섯 촌(村)의 합의로 탄생한 사로국(斯盧國)은 이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으로는 나라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시기를 이렇게 전한다. 소국 연맹체였던 변한(卞韓)의 일부 세력이 귀순하거나 복속되었고, 왜인(倭人)의 병선 백여 척이 해변을 노략질했다. 그리고 금성(金城)을 쌓았다.1 간결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 안에는 국가 형성의 핵심 논리가 압축되어 있다 — 외부의 위협이 내부의 경계를 요청한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선언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다’라는.
그러나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 성벽은 과연 외적만을 막기 위해 세워지는가. 서라벌의 목책과 토성과 석성이 차례로 쌓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성벽이 동시에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인간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지배는 성벽이 세워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역부(役夫)의 등에 새겨진 나라
성은 누가 쌓는가.
왕이 쌓지 않는다. 촌장이 쌓지 않는다. 성은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쌓는다.
사로국 초기의 성은 목책(木柵)이었다. 나무를 베어 세운 울타리. 도끼와 손발만 있으면 누구나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물이 세워지는 순간, 사람들의 일상이 바뀌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손이 나무를 베었다. 씨를 뿌려야 할 발이 언덕을 오르내렸다. 국가의 웅장한 건국 서사 뒤에,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등과 무릎이 있었다.
훗날 삼국이 체제를 정비하면서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등장한다. 돌 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 — 어느 구역을 누가 쌓았는지, 어느 집단이 담당했는지를 기록한 감독 체계의 흔적이다. 신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년)가 대표적 사례다. 돌에 새긴 이름은 책임의 귀속이었고, 동시에 국가의 눈이 거기까지 미친다는 선언이었다.2 사로국 초기의 목책에는 이름이 새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원의 논리는 이미 그때부터 작동하고 있었다.
공간이 계급화되었다. 성 안에 사는 자와 성 밖에 사는 자. 전쟁이 나면 성 안으로 피란할 수 있는 자와 그 밖에 남겨지는 자. 이 구분이 심리적 복종의 구조를 만들었다. 구제받는 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은 성을 쌓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속했다. 지배의 효율성은 공포에서만 오지 않는다. ‘보호’라는 약속이 권력의 가장 강력한 정당성이었다.
목책에서 토성으로, 토성에서 석성으로
서라벌의 성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
목책(木柵) — 토성(土城) — 석성(石城). 이것이 신라 서라벌 성곽 체제의 발전 궤적이다. 단순한 기술 진보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권력의 공고화 과정이 담겨 있다.
목책은 누구나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판축(版築) 토성은 다르다. 나무틀을 짜고 그 안에 흙을 다져 층층이 쌓아 올리는 공정 — 이것은 집단 노동의 조직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력을 모으고, 일정을 짜고, 구역을 나누고, 완성도를 검수하는 관리 체계가 처음으로 요구된다. 토성을 쌓는다는 것은 국가 행정의 첫 번째 연습이었다.
석성은 차원이 달랐다. 채석장을 선정하고, 돌을 쪼개고, 운반하고, 맞물려 쌓는 기술 — 수십 년의 경험이 축적된 전문 기술자 집단 없이는 불가능했다. 축성 기술을 독점한 집단이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축성의 지식은 곧 지배의 지식이었다.
동시에, 거대한 석성을 세우는 능력 자체가 지배자의 권위를 가시화했다. 백성들이 올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금성(金城)은, 박혁거세의 신화적 권위가 물리적 공간 속에 굳어진 결과물이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구전(口傳)이라면, 성벽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화였다.
세계사의 거울 — 성벽이 만드는 세계
서라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를 본격화했을 때, 그것은 흉노를 막기 위한 방어선이기도 했지만 — 동시에 내부를 향한 통제의 선언이었다. 장성을 경계로 농경민은 떠날 수 없었다. 북쪽 유목 세계로의 탈출을 막는 물리적 장벽. 장성의 남쪽은 제국의 조세 징수 구역이었고, 장성은 그 구역을 묶어두는 테두리였다.3 성벽이 제국을 지켰지만, 성벽을 쌓은 무게가 제국을 병들게 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 122년)은 더 노골적인 이분법이었다. 브리타니아 북부를 가르는 이 방벽은 ‘로마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었다. 방벽의 남쪽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화적 장치였다. 경계선이 정체성을 만든다. 성벽이 안쪽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쪽에 속한다”고 말한다.4
그리스 폴리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언덕 위의 신전과 성채는 군사적 방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폴리스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아테네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볼 때, 그들은 공동체에 속한 ‘시민’임을 확인했다. 반면 그 언덕에 들어갈 수 없는 노예들에게 그 공간은 배제의 선언이었다.
신라의 산성 문화는 이 세 가지와 결이 다르다. 그리스는 평지 구릉을 중심에 두었고, 로마와 진(秦)은 팽창의 최전선에 경계를 그었다. 그러나 신라는 배후 산악 지형을 활용한 산성을 도성 뒤편에 두었다. 장기 농성(籠城)이 전략의 기본값인 나라 —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인 나라. 이 군사 철학이 임진왜란의 산성 전술로, 병자호란의 남한산성으로 천 년 뒤에도 이어진다.
안과 밖 — 심리적 장벽의 내면화
성벽이 세워지면, 그 안과 밖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성벽의 가장 깊은 정치적 효과다.
성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호받는 자’라는 감각을 내면화한다. 전쟁이 나면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 — 그 감각이 지배 질서에 대한 심리적 복종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성 밖의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면 스스로 성 안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구제를 요청하는 자’가 된다. 이 순간 권력 관계는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구제받는 자’와 ‘버려지는 자’의 경계선이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 경계선이 전쟁 이전에 이미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평시의 신분 — 씨족 내 위계, 6부(六部) 소속, 관직의 유무 — 이 위기의 순간 성문 통과권이 된다.
사로국의 6촌이 6부(六部)로 재편되는 과정도 이 공간 재구성과 궤를 같이한다. 성 안에 함께 사는 것은, 같은 국가에 속한다는 것이다. 씨족 단위의 ‘우리’가 서라벌이라는 도성 공간을 공유하는 ‘우리’로 교체되기 시작한다. 성벽이 그 교체를 물리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공간 재편 속에서 이주민과 정복지 주민들의 운명이 갈렸다. 6촌 중심의 기득권은 성벽을 높이면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유입된 세력들은 성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 안에서도 다시 안과 밖이 나뉘었다. 이 중층적 배제의 구조가 훗날 골품제(骨品制)라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결정화되는 씨앗이었다.
포용의 성벽이 배제의 성벽이 되다
신라 성곽 체제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사로국의 성은 처음에 포용을 위해 세워졌다. 왜(倭)의 침략을 막고, 변한 세력의 귀순을 수용하고, 고조선 유이민을 흡수하기 위해 — 성은 더 많은 사람을 안으로 품는 구조였다. 석탈해(昔脫解)가 바다 건너 이방인의 몸으로 신라의 4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포용의 구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성 안에 들어온 자들이 정착하고, 씨족이 대를 이으면서, 포용의 문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6촌 중심의 기득권이 성벽 안에 자신들만의 리그를 요새화하는 방향으로, 성벽의 기능이 전환된 것이다. 금성(金城)과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라벌의 공간 질서는, 특정 씨족과 골품(骨品)의 지배를 공간 속에 각인했다.
성벽의 정치학은 언제나 이 질문을 피하지 못한다 — 누가 성을 쌓는가, 누가 성의 보호를 받는가, 그리고 그 두 집단이 같은 집단인가. 신라 초기에 이 두 집단은 달랐다. 그 간극이 벌어지는 속도가 신라의 미래를 결정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성 안에 살고 있는가
기원전 37년 전후 서라벌의 목책은 멀다. 그러나 성벽의 논리는 지금도 작동한다.
전 세계에서 동시에 성장하고 있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는 현대의 성이다. 담장과 경비원, 입주민 전용 인프라 — 구조는 서라벌의 목책과 다르지 않다. 주목할 것은 이 성벽이 외부의 적에 맞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체 스스로가 경계를 선택했다. 보호가 아니라 구별을 위해. 사로국의 6촌 기득권이 성벽 안에 자신들만의 리그를 요새화해 가던 그 논리와 정확히 겹친다.
유럽은 더 선명한 역설을 보여준다. 솅겐(Schengen) 협약으로 유럽 내부의 국경은 사라졌다. 그러나 외부를 향한 장벽은 오히려 높아졌다. 헝가리 국경 철조망, 그리스-튀르키예 펜스 — 포용의 연합이 배제의 요새로 전환되는 속도는, 신라 초기 서라벌의 성벽이 골품제로 굳어지던 속도와 닮아 있다. ‘우리 안’의 통합이 강해질수록, ‘우리 밖’의 경계는 더 날카로워진다. 성벽은 언제나 두 방향을 동시에 향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또 다른 성벽이다. 카카오가 구축한 ‘가두리 양식장’ 같은 플랫폼 생태계, 빅테크의 앱 생태계 — 현대인들은 스스로 거대한 성벽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성벽이 만든 규칙 안에서 산다. 이 성벽이 더 교묘한 것은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편의라는 약속이 자발적 복속을 만든다. 서라벌의 민중이 왜의 침략을 피해 스스로 성 안으로 달려간 것처럼.
글로벌 차원에서는 ‘신(新) 만리장성’들이 세워지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만든 반도체 공급망 분절, 자국 우선주의 입법, 데이터 주권 논쟁 — 이 모든 것이 국가 단위의 성벽 쌓기다. 세계화가 허물었다고 믿었던 경계선들이, 새로운 형태로 복원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안에도 성벽이 있다.
2024년 말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정치는 극단적 이분법의 시대를 통과했다.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 광화문과 여의도. 특정 유튜브 채널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과, 그 바깥에서만 사는 사람들. 우리는 각자의 정보 성채(城砦) 안에 웅크리고 있다. 알고리즘이 쌓은 이 성벽은 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허물기 어렵다. 자신이 성 안에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벽은 계속 높아진다.
최근의 지방선거를 거치며 새롭게 재편된 정치 지형 속에서, 권력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는 고대와 다르지 않다. 권력이 최초로 성을 쌓기 시작하는 방식 — 누구의 목소리를 성 안으로 품고 누구를 성 밖으로 밀어내는가 — 가 향후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사로국이 금성을 쌓았을 때, 그 성의 구조 안에 신라 천 년의 미래가 설계되었다. 포용의 성벽이 배제의 성벽으로 굳어지는 속도가 그 미래를 결정했다.
신라는 가장 늦게 삼국을 통일했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그 역설의 열쇠는 초기 서라벌의 성 안에 있었다. 성을 포용의 공간으로 유지하는 동안 신라는 강했다. 성이 기득권의 요새로 굳어지기 시작했을 때, 쇠락의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비극의 씨앗은 건국의 빛나는 순간 안에 이미 심어져 있었다. 여섯 촌의 합의가 만든 포용의 공간이, 골품이라는 철벽으로 굳어지기까지 — 그 과정이 이 시리즈의 다음 장들이다. 비극은 악인이 나타나서 시작되지 않는다. 비극은 선한 설계 안에 담긴 모순이, 시간을 타고 자라날 때 시작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성 안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성은 당신을 지키는가, 아니면 당신을 가두는가.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멀리서 본다. 기원전 37년 서라벌의 첫 번째 목책과 2026년 서울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같은 질문 위에 서 있다고 느낀다면 — 그 질문은 이미 이 글을 읽는 당신 안에 있다.
* 참고할 말씀: ‘성읍을 빼앗는 것은 장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언 16:32
각주 및 출처
1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혁거세거서간 21년조. 금성 축조 시점에 대해서는 학계 이견이 있으나 혁거세 재위기(B.C. 57~A.D. 4) 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한의 귀순 기록은 당시 변한이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일부 세력의 복속 정황을 신라 중심적 사관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2 신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년)는 각자성석의 대표적 사례로, 축성 구역별 담당자 명단과 책임자를 새겨 관리 책임을 명시한 고대 감독 행정 문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3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만리장성 축조 및 농경민 이동 통제 관련 기록.
4 David J. Breeze & Brian Dobson, Hadrian’s Wall (Penguin Books, 2000).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군사적·문화적 기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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