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대왕의 공포 정치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 내부 전경. 붉은 카페트가 깔린 중앙 발언대와 의장석, 그 앞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국회의원 좌석들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어 합의와 견제, 절차적 정당성에 기반한 민주주의 의회 권력을 상징하는 실내 사진

차대왕의 공포 정치

힘의 통치는 왜 오래 못 가는가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3-고구려-① · 2026.07.27


일흔여섯의 왕이 왕위에 오른 밤

한 사람이 권력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면, 마침내 왕좌에 앉는 순간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서기 146년, 고구려의 수성(遂成)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사냥터에서 측근들에게 “대왕이 늙어도 자리를 내놓지 않고, 내 나이는 이미 말년에 가까워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순간부터 고구려의 권력 구조는 이전과 다른 논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국사기』는 그가 즉위할 당시 이미 일흔여섯이었다고 전한다. 이 나이 기록에는 다소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다. 그는 늙은 왕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늙은 왕을 압박해 권력을 넘기게 만들었다.

대신들의 경고, 그리고 침묵으로 답한 권력

좌보(左輔) 고복장(髙福章)은 태조왕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수성을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그러나 이미 백 살에 가까운 태조왕은 이 경고를 흘려들었다.

146년 12월, 태조왕은 결국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삼국사기』는 이를 “선위(禪位)”라는 두 글자로 정리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무력의 압박이 있었다. 차대왕은 이때부터 165년까지, 19년간 고구려를 통치하게 된다.

즉위 이듬해인 147년, 차대왕은 곧바로 논공행상에 들어갔다. 자신을 지지한 미유(彌儒)·어지류(菸支留)·양신(陽神)을 좌보와 중외대부에 앉혀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경고를 입에 담았던 고복장을 처형했다.

죽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태조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이 목숨을 잃었고, 동생 막덕(莫德)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직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위 계승 서열에 놓여 있던 이들이 차례로 제거된 것이다. 훗날 8대 신대왕이 되는 또 다른 이복동생 백고(伯固)는 산골짜기에 몸을 숨긴 채 오랜 시간을 버텼다.

로마는 같은 시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반대편의 로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넘기고 있었다. 13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혈연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안토니누스는 다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아 자연스러운 승계를 준비시켰다.
차대왕이 측근을 처형하며 권력을 다지던 바로 그 무렵, 로마는 오현제(五賢帝) 시대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 세상을 떠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별다른 유혈 없이 제위를 이어받았다.
한쪽에서는 왕의 아들들이 차례로 살해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후계자가 수십 년간 검증받으며 권력을 준비했다. 같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권력은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비가 로마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년에 스스로 지켜온 양자 입양의 전통을 깨고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겼다.
그 결과 로마 역시 곧 혼란과 폭정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제도가 살아 있어도,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흔들리는 순간 권력은 다시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두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권력이 합의된 절차를 통해 이양될 때 사회는 그 충격을 흡수하지만, 권력이 힘으로 탈취될 때 사회는 그 대가를 다음 세대까지 치른다.

로마의 안토니누스-마르쿠스 계승은 검증과 합의라는 절차 위에 서 있었다. 반면 차대왕의 즉위는 협박과 침묵 위에 서 있었다.
그 차이는 즉위 순간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차이는 그 이후, 누가 살아남고 누가 제거되는지를 통해서만 드러났다.

차대왕의 통치는 19년간 이어졌지만, 그 통치를 지탱한 것은 신뢰가 아니라 공포였다.
결국 165년, 국상(國相) 명림답부가 그를 시해하면서 19년의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힘으로 세운 권력은, 힘이 다하는 순간 함께 무너졌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대왕은 즉위 이듬해인 166년,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로 나뉘어 있던 최고 관직 체제를 폐지하고 국상(國相)이라는 단일 재상 직위를 신설했다.
합의와 견제 기능을 상실했던 기존 좌·우보 체제로는 폭정을 막을 수 없었다는 고구려 지배층의 뼈아픈 반성이 반영된 개혁으로 읽힐 수 있다. 그 첫 국상 자리에는 다름 아닌 명림답부가 앉았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정작 왕을 시해한 인물이 새 체제의 정점에 올랐다면, 이것은 진정한 제도 개혁인가, 아니면 또 다른 승자의 전리품에 불과한가.
기록은 명림답부가 그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후한의 침입을 물리치며 국정을 안정시켰다고 전한다. 제도가 사람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제도를 지켜낸 것인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앞서 살펴본 로마가 콤모두스라는 선택으로 도달한 궤적과, 고구려가 국상제 신설로 나아간 지점은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로마는 이미 검증된 후계 제도를 갖추고 있었으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선택으로 그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반면 고구려는 유혈 사태라는 비극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제도를 재설계해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제도는 만들어지는 순간에도 지켜지는 순간에도 결국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여기에 있다. 권력이 여전히 합의와 견제,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양되고 있는가, 아니면 힘과 진영의 논리가 다시 그 제도를 압도하려 하는가.

1,900년 전 고구려의 왕좌와 오늘날 민주주의의 권력은 형태가 전혀 다르지만, 절차를 잃은 권력이 다다르는 끝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

역사는 승자의 이름은 명확히 기록하지만, 그 승리가 무엇을 딛고 서 있었는지는 쉽게 조명하지 않는다.
차대왕도, 그를 시해하고 신대왕을 세운 명림답부도 결국 힘이라는 같은 방식으로 왕좌의 주인을 바꿔놓았다. 제도가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또 다른 힘의 관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자는 묻는다. 우리는 지금 제도를 다듬고 있는가, 아니면 힘의 논리를 합리화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만들어가는 권력의 이양 방식은, 훗날 역사 앞에 어떤 이름으로 기록될 것인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백제 개루왕 후기의 대중국 외교와 고구려 압박 사이의 줄타기를 살펴보았다.
국경 밖의 거인들 — 개루왕 후기


* 참고할 말씀: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잠언 29:2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94년(146년) 12월조 — 태조왕의 선위 기록.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차대왕 2년(147년)조 — 미유·어지류·양신 임명 및 고복장 처형 기록.
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2년(166년)조 — 좌·우보 폐지 및 국상(國相) 제도 신설 기록.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차대왕” 및 “명림답부” 항목 (encykorea.aks.ac.kr) — 즉위 배경, 초대 국상 취임 및 후한 격퇴 기록 참고.
5.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태조대왕” 항목 — 막근·막덕 사망 경위 참고.
6. 로마사 관련 기술은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승계 및 콤모두스 제위 승계에 관한 일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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