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을 쌓는다는 것
87년, 파사왕의 방어선
역사·한국사 | 2026.07.13
방위비 분담, 동맹의 비용, 국경의 예산 — 최근 뉴스를 채우는 단어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국경을 지키는 데 얼마가 드는지, 그 몫을 누가 부담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질문은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국경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백성의 노동과 곳간을 얼마나 쓸 것인가 — 이 셈법은 국가라는 형태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통치자를 따라다녔다.
서기 87년, 한반도 동남쪽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도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성벽 위에 새겨진 시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 8년(87년) 7월, 신라는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 두 곳에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1 이 시기 신라는 아직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조심스러운 작은 정치체였다. 낙동강 유역을 사이에 두고 가야 세력과의 긴장이 이어지던 때였고, 앞서 이 시리즈에서 다룬 77년의 낙동강 결전, 80년 파사왕의 즉위 이후로도 그 국경은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두 성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완전히 합의되지 않았다. 가야와의 접경지인 경남 거창·합천 일대로 보는 견해와, 서북방 진출의 길목인 경북 상주·군위 일대로 보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있다. 위치를 둘러싼 이견은 있지만, 두 견해 모두 신라의 중심부가 아니라 세력권이 맞닿는 접경 지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겹치는 이런 길목은 방어군이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의 이동을 늦출 수 있는 지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복해야 할 평야가 아니라, 지켜야 할 길목에 성을 쌓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 신라의 전략이 확장이 아닌 통제였음을 시사한다.
주목할 점은 이 축성이 정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파사왕은 이 시기 가야를 향해 군대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 성을 쌓았다. 흙을 나르고 돌을 쌓는 노동에 백성을 동원하고, 그 비용을 곳간에서 꺼내는 선택이었다. 정복에 드는 비용과 방어에 드는 비용을 저울질한 끝에, 파사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성을 쌓는다는 행위는 겉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치적인 선택이다. 국경에 돌을 쌓아 올리는 순간, 그 안쪽은 “우리의 땅”으로 선언되고, 그 바깥쪽은 “협상해야 할 대상”으로 재정의된다. 방어는 힘의 부족을 감추는 행위가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비용 안에서 힘의 범위를 확정하는 행위였다.
같은 시간, 다른 대륙
흥미로운 것은, 거의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의 로마 제국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83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카티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기점으로 라인강 상류 지역에 감시탑과 목책을 잇는 국경 방벽, 이른바 리메스(limes)의 건설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2 이 방벽은 정복의 연장이 아니라, 승리한 자리에서 “여기까지가 로마이고 그 너머는 관리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 행위였다.
같은 시기 다뉴브강 방면에서는 다른 계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가 모이시아 속주를 침공하며 국경 위기를 일으켰고, 로마는 완전한 승전을 거두지 못한 채 89년경 화친에 가까운 협정을 맺었다. 이때 로마는 정복 대신 매년 다키아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택했다.3 군대를 밀어붙여 영토를 늘리는 비용보다, 돈을 지불하고 국경을 관리 가능한 선에서 묶어 두는 비용이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으로 읽힌다. 승리한 라인강에서는 벽을 쌓고, 승리하지 못한 다뉴브강에서는 돈을 지불한다 — 방식은 달랐지만 셈법은 하나였다. 확장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요구하는 지점에서, 로마는 정복 대신 관리 가능한 경계를 확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의 작은 성 두 곳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방벽은 규모에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사건이 같은 시대에,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두 정치체에서 동일한 논리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동서양에서 반복되는 이 패턴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선을 긋는 자의 셈법
파사왕과 도미티아누스는 서로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같은 계산을 했다. 한비자는 「팔경(八經)」에서 “명주도력이행(明主度力而行)” — “밝은 군주는 그 힘을 헤아려 일을 행한다” — 라 하였다. 확장이 힘의 한계를 넘어설 때 군주가 할 일은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미치는 범위를 정직하게 긋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20세기 국제정치학은 이 오래된 직관에 이름을 붙였다.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로 대표되는 세력균형론(Balance of Power Theory)은, 국가가 자신의 힘이 상대를 압도하지 못할 때 동맹이나 방어선 구축을 통해 균형을 되찾으려 한다고 설명한다.4 파사왕의 축성과 도미티아누스의 리메스는, 이 이론이 말하는 “내적 균형화(internal balancing)” —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국경을 다지는 방식 — 의 고대적 원형으로 읽힐 수 있다. 국제정치 이론이 20세기에 발명한 것은 개념이었을 뿐, 그 계산 자체는 성벽을 쌓던 손끝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방어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냉정한 정치 행위였다. 그리고 그 결정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셈법이 있었다 — 백성의 노동, 곳간의 곡식, 그리고 얼마나 더 밀어붙일 수 있는가에 대한 냉정한 계산.
우리는 지금 어떤 선을 긋고 있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방위비 분담금과 한미동맹 비용, 국방예산 증액을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에 있다. 안보관과 재정관을 앞세운 논쟁의 밑바닥에는 87년 신라와 80년대 로마가 마주했던 질문이 똑같이 놓여 있다. 바로 ‘확장할 수 없다면 무엇을 지키고, 그 대가를 누가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이기 이전에, 모든 정치체가 국력의 한계 앞에서 반복해 온 계산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소성과 마두성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국경에 무엇을 세우고,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성을 쌓고 있는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검소한 왕이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검소한 왕이 민심을 얻는 방식) 민심을 얻은 왕이 그다음 손댄 것은, 다름 아닌 국경이었다.
참고할 말씀
‘여호와께서 성읍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 시편 127:1
인간이 아무리 냉정하게 계산하여 성을 쌓을지라도, 그 안을 채우는 내부의 결속과 신뢰가 없다면 그 계산은 결국 무력해진다.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파사이사금 8년조.
2. 83년 카티족 전쟁 및 게르마니아 리메스 건설에 관한 서양 고전학계의 통설.
3. 89년경 로마-다키아 화친 및 보조금 지급에 관한 통설.
4. Kenneth Waltz,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1979).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