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① / 6편
땅을 기억하는 자들의 나라
— 디아스포라에서 건국까지, B.C. 2세기 ~ 1948년
2026년 6월 · 세계사 · Watchman
하나의 땅, 두 개의 기억
지도에는 이름이 하나다. 그러나 그 땅을 부르는 이름은 둘이다.
유대인에게 그곳은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israel) — 약속의 땅이다. 2천 년의 유랑 끝에도 기도 속에 살아있던 이름. 매년 유월절이 끝날 때마다 그들은 이 말로 작별했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Next year in Jerusalem).” 아랍인에게 그곳은 팔레스타인(Filastin) — 삶의 터전이자, 그곳에서 그들이 1,300년간 밭을 갈고, 올리브를 수확하고, 아이를 묻어온 땅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귀환자’들이 밀려와 그 땅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갈등을 종교 전쟁으로 읽는 것은 절반만 맞다. 이슬람과 유대교의 교리 차이가 아니다. 두 민족주의가 같은 좁은 땅 위에서 동시에 깨어난 것, 그리고 그 틈새에 대영제국이 세 개의 약속을 동시에 던진 것 — 이것이 오늘의 중동을 만든 진짜 씨앗이다.
이 시리즈는 그 씨앗이 뿌려진 순간부터 현재까지를 따라간다. 첫 번째 편은 가장 긴 시간을 다룬다. B.C. 2세기부터 1948년 건국까지 — 2천 년의 추방, 근대 민족주의의 탄생, 그리고 한 나라의 건국이 다른 민족에게 대재앙이 되는 순간까지.
추방 —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B.C. 2세기, 팔레스타인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 율법을 금지했다. B.C. 167년, 마카베오 가문이 반기를 들었다. 3년간의 게릴라 전투 끝에 유대인들은 신전을 탈환했다. 오늘날 하누카(Hanukkah)가 기념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러나 독립의 불꽃은 오래 타지 못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유대는 로마 속주로 편입됐다.
로마 지배 아래 두 차례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A.D. 66년 1차 유대-로마 전쟁은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제2성전 파괴로 끝났다. 그리고 A.D. 132년, 시몬 바르 코흐바가 마지막 반란을 일으켰다. 135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유대인의 흔적을 지도에서 지우기로 했다. 유대(Judea)라는 지명을 폐지하고, 유대인의 오랜 적이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라틴어 표기인 필리스티아(Philistia)에서 이름을 따 이 땅을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로 개칭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대인을 지우려 했던 황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십만 명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렸고, 예루살렘 입성은 영구 금지됐다.1
이것이 디아스포라(Diaspora) — 흩어짐 — 의 공식적 시작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어디서나 이방인이었다. 기독교 유럽에서 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 낙인찍혔고, 토지 소유가 금지된 탓에 상업과 금융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 성공이 다시 질투와 박해를 불렀다. 그래도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매년 유월절 저녁, 식탁 위에 쓴 나물을 올리고 이집트 탈출의 기억을 되새기며, 같은 말로 저녁을 마쳤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2천 년간 땅 없이 민족적 결속을 유지했다. 역사상 이에 필적하는 사례는 없다.”
— 역사학자 폴 존슨, A History of the Jews (1987). 원문의 ‘nationhood’를 민족적 결속·정체성의 유지로 옮겼다.
19세기 후반, 이 인내가 한계에 봉착했다. 러시아에서는 포그롬(Pogrom) —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과 약탈 — 이 반복됐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수백 개의 마을에서 유대인들이 살해되고 재산이 불탔다. 서쪽으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군중의 함성이 파리 거리를 가득 채웠다. 계몽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반유대주의는 건재했다.
시오니즘의 탄생 — “국가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국가를”
드레퓌스 재판을 파리에서 취재한 오스트리아 기자가 있었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그는 계몽된 유럽조차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해법은 하나였다 — 유대인만의 나라.
1896년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를 출판했다. 이듬해인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다. 200여 명의 대표가 모여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헤르츨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나는 유대 국가를 세웠다. 50년 안에, 세상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2 그의 예언은 51년 만에 현실이 됐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880년대 기준으로 이 지역 인구는 약 45만 명이었으며, 무슬림이 약 4분의 3, 기독교인이 약 4분의 1, 유대인이 약 2만 4천 명이었다.3 시오니즘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 ‘아랍인 문제’는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민족 없는 땅에 민족 없는 국가를(A land without a people for a people without a land)”이라는 구호는 당시 유럽과 영국의 기독교계 시오니스트들 사이에 먼저 유행하던 표현이었다. 이 오만한 수사를 시오니즘 운동이 차용하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존재는 담론에서 지워졌다. 일부 지도자들은 아랍인들이 자발적으로 떠날 것이라고, 혹은 경제 발전의 혜택을 받고 오히려 환영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 낙관이 비극의 첫 번째 씨앗이 됐다.
올리브 나무 아래의 삶 —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기억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었다. 이 땅의 아랍인들은 수백 년간 농사를 짓고, 올리브를 수확하고, 예루살렘의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정체성은 민족보다 종교와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대였다.
첫 번째 알리야(Aliyah, 유대인 이주 물결)가 시작된 것은 1882년이었다. 러시아의 포그롬을 피해 온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큰 충돌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황무지와 습지를 개간했고, 일부 땅은 오스만 지주나 부재 아랍 지주에게서 구입했다. 그러나 땅이 팔릴 때마다, 그 땅에서 수십 년간 소작을 짓던 아랍 농민들이 쫓겨났다. 경제적 갈등이 싹텄다.
1904년 시작된 2차 알리야는 성격이 달랐다. 이 이주자들은 단순한 난민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이념가들이었다. 그들은 ‘노동의 정복(Kibbush HaAvoda)’이라 불리는 교리 아래,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 노동자만으로 경제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에 따라 아랍인 노동자는 고용하지 않았다. 경제적 분리가 심화됐다. 두 공동체는 같은 땅 위에서 점점 별개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영국의 세 가지 약속 — 제국이 매설한 폭탄
1차 세계대전이 이 땅을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서자, 영국은 중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세 가지 게임을 벌였다. 그리고 세 가지 모두 같은 땅을 담보로 걸었다.
① 맥마흔-후세인 서한 (1915년): 아랍인에게 한 약속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에게 서한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아랍 반란을 일으키면 전후 독립 아랍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팔레스타인이 그 영역에 포함되는지 여부는 편지에 모호하게 처리됐다 — 훗날 이 모호함이 양쪽 모두에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줬다. 아랍인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도 포함된 약속으로 이해했다.
②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영국과 프랑스의 밀약
아랍에게 한 약속이 채 식기도 전에,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피코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전후 중동을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갖겠다는 내용이었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 몫,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은 영국 몫. 팔레스타인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분류됐다. 아랍인들에게 한 독립 약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밀약이었다. 이 협정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오스만 문서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4
③ 밸푸어 선언 (1917년): 유대인에게 한 약속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 시오니즘 연맹 회장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 건설에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단 67단어로 쓰인 이 편지가 밸푸어 선언이다. 영국이 이 선언을 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고, 러시아 유대인들을 통해 동부전선을 유지하며, 전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편지 어디에도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동의는 없었다. 밸푸어 자신이 나중에 인정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기존 주민들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았다.”5
세 개의 약속. 하나의 땅을 두고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혹은 방치된 시한폭탄이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분쟁의 씨앗을 심었다.
폭발하는 화약고 — 영국 위임통치령 (1920~1939)
1차 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미 세 개의 약속이 충돌하는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다.
유대인 이민은 계속 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특히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격화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의 숫자가 급증했다. 1922년 약 8만 4천 명이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1936년 약 38만 명으로 불어났다.6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이 눈앞에서 변해가는 것을 지켜봤다.
1929년, 작은 불꽃이 대형 화재로 번졌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Western Wall)을 둘러싼 종교적 갈등이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 헤브론에서는 아랍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해 67명을 학살했다. 텔아비브 인근에서는 유대인들의 보복 공격이 뒤따랐다. 종교적 성지가 민족주의적 폭력의 도화선이 된 첫 번째 대규모 사태였다.
1936년에는 더 큰 폭발이 왔다. 아랍 대봉기(Arab Revolt, 1936~1939)였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6개월간의 총파업을 선언하고, 영국 군대와 유대인 정착촌을 동시에 공격했다. 영국은 항공 폭격과 집단 처벌, 마을 파괴로 대응했다. 3년간의 봉기에서 아랍인 5천여 명, 유대인 400여 명, 영국군 200여 명이 사망했다.7 그러나 더 치명적인 결과는 따로 있었다. 봉기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부가 사실상 와해됐다. 1948년이 오기 전에 이미 아랍 쪽의 군사·정치 지도력은 심각하게 손상돼 있었다.
봉기의 여파로 영국은 1939년 백서(White Paper)를 발표해 유대인 이민을 앞으로 5년간 7만 5천 명으로 제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유럽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 세계가 눈을 감은 사이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Endlösung)’을 실행에 옮겼다. 가스실과 강제수용소.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 당시 세계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1이었다.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대인의 90%가 살해됐다.
홀로코스트는 시오니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유대인 국가가 있었다면 이 일이 일어났겠는가”라는 질문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영국 위임통치령의 이민 제한이 사실상 유럽 유대인들의 도피처를 막아버렸다는 사실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유대인 생존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려 했다. 영국은 이들을 막았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1947년의 엑소더스(Exodus)호 사건이었다. 4,500명의 유대인 생존자들이 탑승한 이 낡은 선박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출발했다. 영국 해군이 공해상에서 나포해 승객들을 독일의 수용소로 강제 송환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다시 독일로 끌려가는 장면이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국제 여론은 들끓었다. 영국은 이 문제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1947년 2월,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분할안과 두 개의 운명 — 1947~1948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제181호를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전체 면적의 약 56%)와 아랍 국가(약 44%), 그리고 국제 관리 구역 예루살렘으로 분할하는 안이었다.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찬성표를 던졌다 — 냉전 시대 두 강대국이 같은 편에 선 극히 드문 순간이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환호했다. 아랍 세계는 전면 거부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었고, 토지 소유는 약 7%에 불과했다. 그런데 분할안은 유대 국가에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배정했다. 아랍 측에 이 결의안은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땅을 다수결로 처분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엔 결의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두 공동체의 적대감은 전면적인 내전으로 치달았다. 1948년 4월 9일, 데이르 야신(Deir Yassin) — 예루살렘 서쪽의 아랍 마을 — 에서 유대인 무장단체 이르군과 레히가 주민들을 학살했다. 공식 집계로 107명, 일부 주장으로는 250명 이상이 사망했다.8 이 학살 소식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아랍인들에게 공포를 퍼뜨렸다. 수십만 명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도망쳤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의 박물관 홀.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에레츠 이스라엘 땅에 유대 국가를 선포한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바로 그날 자정,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 5개국 연합군이 국경을 넘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결과는 아랍 세계의 예상과 달랐다. 이스라엘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유엔 분할안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살아남았다. 1949년 정전협정이 체결됐을 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원래 분할안의 56%에서 78%로 늘어나 있었다.
알 나크바 — 한쪽의 건국이 다른 쪽의 대재앙이 될 때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독립전쟁(War of Independence)’이라 부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같은 시기를 ‘알 나크바(Al-Nakba)’ — 아랍어로 ‘대재앙’ — 라 부른다.
1947년 11월부터 1949년 정전까지, 약 70만에서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고향을 잃었다.9 일부는 전쟁의 공포를 피해 스스로 떠났고, 일부는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수백 개의 아랍 마을이 파괴됐다. 그들이 떠난 집과 땅은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배분됐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난민들의 귀환을 거부했다. 그들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이스라엘이 관할하게 된 가자 지구와 서안지구의 난민 캠프에 수용됐다.
75년이 지난 지금, 그 난민들의 후손은 500만 명을 넘는다. 그들은 여전히 ‘귀환권(Right of Return)’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를 거부한다. 오늘의 가자 지구 분쟁, 서안지구 정착촌 문제, 2023년 10월 7일의 하마스 공격과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 — 이 모든 것의 뿌리가 1948년 그 난민 캠프에 있다.
“우리는 땅이 아니라 토지대장을 잃었다. 땅은 여전히 우리 발 아래 있다.”
— 1948년 가자로 피신한 팔레스타인 난민 이브라힘 아부-라야, 1979년 인터뷰
바라보는 자의 메모: 한국이 이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 갈등을 악인과 선인의 구도로 읽는 것은 역사를 해치는 일이다. 유대인은 2천 년간 박해받았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사건 이후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권리를 가졌다. 팔레스타인인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역사의 결과로 고향을 잃었고, 그 상실에 대한 정의를 요구할 권리를 가졌다. 두 개의 권리가 충돌하고 있다.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가 다른 쪽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구조 안에서.
여기서 진짜 책임자는 어디 있는가. 세 개의 약속을 동시에 남발했던 영국 제국주의의 외교. 편리한 침묵으로 학살을 방관했던 국제사회.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타자의 존재를 지워버린 양쪽 모두의 순간들. 민족주의가 맹목적 신앙이 될 때,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눈감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집단의 서사가 절대화되는 순간 타자는 배경이 되고, 배경이 된 존재는 희생돼도 괜찮은 것처럼 여겨진다. 역사는 이 인간의 보편적 취약성을 민족과 세기를 가리지 않고 반복해서 증언한다.
한국에게 이 역사는 낯설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 민족의 운명. 우리는 그 구조를 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더 깊이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갈등은 중동의 유가를 결정하고, 국제 외교의 지형을 바꾸며, 한국의 수출입과 안보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반복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다. 하나의 땅 위에 두 개의 권리증을 발행한 제국주의의 외교. 민족주의가 각성할 때 타자를 지워버리는 인간의 습성. 그리고 강자의 결정이 약자의 삶을 수백 년 동안 결정해버리는 권력의 비대칭.
1948년 5월 14일, 예루살렘에서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집을 잃었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역사 안에 있다. 어느 한쪽만 보는 것은 진실의 절반을 버리는 일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나라가 어떻게 세 번의 전쟁을 거쳐 오늘의 이스라엘이 됐는지를 따라간다. 이긴 자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 참고할 말씀: ‘땅은 영영 팔지 말 것은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 레위기 25:23
각주 및 출처
1 바르 코흐바 반란과 팔레스티나 개칭: Cassius Dio, Roman History, Book 69; Menahem Mor, The Second Jewish Revolt: The Bar Kokhba War, 132–136 CE (2016). 사망자 수는 약 58만 명, 마을 985개 소각으로 로마 측 기록에 남아 있으나 과장 가능성이 있다.
2 헤르츨의 일기: Theodor Herzl, Complete Diaries, Vol. II, entry September 3, 1897. “In Basel I founded the Jewish State.” 원문은 독일어.
3 1880년대 팔레스타인 인구 구성: Justin McCarthy, The Population of Palestine (1990). 수치는 오스만 인구 조사 및 추산에 기반하며 학자 간 소폭 이견이 있다.
4 사이크스-피코 협정 공개: 1917년 11월 볼셰비키 정부가 오스만 외무부 문서를 공개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David Fromkin, A Peace to End All Peace (1989) 참조.
5 밸푸어의 발언: 1919년 각서에서 밸푸어 자신이 아랍인의 의사를 묻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Doreen Ingrams, Palestine Papers 1917–1922 (1972).
6 위임통치기 유대인 이민 통계: Anglo-American Committee of Inquiry (1946); Benny Morris, 1948: A History of the First Arab-Israeli War (2008).
7 아랍 대봉기 희생자 수: Tom Segev, One Palestine, Complete (2000); Matthew Hughes, “The Banality of Brutality,” English Historical Review (2009).
8 데이르 야신 학살: Benny Morris, 1948: A History of the First Arab-Israeli War (2008). 사망자 수는 107명(이스라엘 군 역사가 모리스)에서 254명(이르군 자체 보고)까지 다양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 집계는 약 110명.
9 팔레스타인 난민 수 추산: United Nations Conciliation Commission for Palestine (1949); Benny Morris, 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 Revisited (2004). 모리스는 약 600,000~760,000명으로 추산. UNRWA 등록 숫자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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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우리는 싸게 빌린 돈이 어떻게 세계를 흔드는지 역사의 패턴을 살펴보았다. → 싸게 빌린 돈이 세계를 흔들 때
【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① 땅을 기억하는 자들의 나라 (B.C. 2세기~1948) — 현재 글
② 이긴 자가 잃는 것들 (1948·1956·1967) — 예정
③ 속죄의 날 탱크가 쏟아졌다 (1973) — 예정
④ 배신자라 불린 평화주의자 (1978·1981) — 예정
⑤ 직접 싸우지 않는 전쟁 (1987~2023) — 예정
⑥ 트럼프는 중동을 멈출 수 있는가 (2025~2026) —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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