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긴 자가 잃은 것들

【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② / 6편

이긴 자가 잃은 것들

— 1948 · 1956 · 1967, 세 번의 승리가 남긴 것

2026년 6월 · 세계사 · Watchman

피로스의 왕관

B.C. 279년, 에피로스(그리스와 알바니아 접경 지역)의 왕 피로스는 로마와 두 차례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 거두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고 만다.” 훗날 역사는 이 역설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 — 이기는 데 드는 비용이 이긴 것의 가치를 초과하는 승리.

이스라엘은 1948년, 1956년, 1967년 세 차례 중동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군사사(軍事史)에 이름을 남길 만한 압도적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들이 쌓일수록 이스라엘이 짊어지는 짐도 쌓였다. 안보를 위해 얻은 영토가 새로운 안보 위협이 됐고, 국제사회의 동정을 받던 다윗은 팔레스타인을 통제하는 골리앗으로 바뀌어갔다. 이긴 자들은 무엇을 잃었는가.

앞선 글에서 우리는 2천 년의 디아스포라와 영국의 세 가지 모순된 약속이 어떻게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대재앙(알 나크바)을 동시에 낳았는지 살펴보았다. 이 편은 그 후를 따라간다. 세 번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들이 중동의 지형을 어떻게 영구히 바꾸어놓았는지를. (앞선 글 읽기)

1948년 — 건국의 환희, 유령의 탄생

1948년 5월 15일 새벽. 이스라엘 독립 선언 다음 날,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 5개국 연합군이 국경을 넘었다. 아랍 세계의 공언은 단호했다. “유대 국가를 바다에 집어던지겠다.” 숫자로만 보면 결과는 뻔해 보였다. 이스라엘 인구 65만 명에 불규칙한 민병대. 아랍 연합군은 정규 군대를 가진 5개국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과 반대로 흘렀다. 이스라엘의 승리 요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단일 지휘 체계의 확립. 이스라엘이라고 처음부터 일사분란했던 것은 아니다. 독립 선언 직전까지도 좌파 성향의 팔마흐(Palmach), 극우 성향의 이르군(Irgun)과 레히(Lehi) 등 민병대들이 제각각 행동하며 내부 균열 직전까지 갔다. 결정적인 전환은 다비드 벤구리온의 결단이었다. 그는 독립 직후 이들 민병대를 강제 해산하고 단일 지휘 체계의 이스라엘 방위군(IDF)으로 통합했다. 1948년 6월 알탈레나(Altalena)호 사건 — 이르군의 무기 밀수선을 이스라엘 군이 포격해 격침시킨 사건 — 은 그 통합 의지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었다. 반면 아랍 연합군은 명목상 동맹이었을 뿐, 이집트와 요르단은 전쟁 내내 서로를 의심했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 해방보다 서안지구 병합에 더 관심이 많았다.1 둘째, 무기 조달. 194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소련제 무기가 이스라엘에 유입됐다. 냉전 초반 소련은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전략을 잠시 구사했다.2 셋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절박함.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전투 의지는 다른 어떤 훈련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1949년 정전협정이 체결됐을 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엔 분할안의 56%에서 78%로 늘어나 있었다. 아랍 연합군은 패퇴했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는 탄생하지 못했다. 요르단이 서안지구를,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각각 점령했다.

이긴 자가 잃은 것: 70만의 유령

그러나 이 군사적 승리의 이면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껴안은 가장 무거운 짐이 있었다.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고향을 잃었다. 역사학자 베니 모리스(Benny Morris)가 이스라엘 군 기밀 문서를 처음으로 전면 열람한 뒤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일부는 전쟁의 공포에 자발적으로 피난했지만, 상당수는 이스라엘 군대의 의도적 추방과 강제 이주의 결과였다.3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사건을 알 나크바(Al-Nakba) — 대재앙 — 라 부른다. 유대인들에게 1948년이 독립의 기적이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것은 실존의 붕괴였다. 난민들은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가자, 서안지구의 임시 캠프로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 정부는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 캠프는 임시 시설이 아닌 영구 거주지가 됐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추방은 거대한 역사적 불의였다.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이다.”
— 베니 모리스(Benny Morris), 1948: A History of the First Arab-Israeli War (2008).

이 난민들의 후손은 오늘날 500만 명을 넘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귀환권(Right of Return)은 이스라엘이 수용할 수 없다 — 허용할 경우 유대인 다수 국가의 인구학적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부한다면 국제법상 명시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 불가능한 방정식이 1948년에 이미 설정됐다. 이스라엘이 거둔 첫 번째 승리가 남긴 첫 번째 저주였다.

1956년 — 제국의 황혼, 청부업자의 낙인

1952년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왕정이 무너지고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권력을 잡았다. 나세르는 단순한 이집트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반식민지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대에, 나세르는 아랍 세계의 독립과 통합을 외치는 목소리가 됐다.

나세르의 가장 도발적인 선택은 1956년 7월 26일에 나왔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영국과 프랑스가 지분을 보유한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가 직접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운하 수입으로 소련의 차관 없이 아스완 댐을 짓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게 이것은 굴욕이었다. 지중해 패권의 상징인 운하를 아랍인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세브르의 비밀: 세 나라의 공모

1956년 10월, 파리 근교 세브르(Sèvres)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대표들이 은밀히 모였다. 협약의 내용은 이랬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선제 공격한다. 그러면 영국과 프랑스가 분쟁을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개입해 운하 지역을 점령한다. 나세르를 제거하고, 수에즈를 되찾는다.

계획은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실행됐다.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로 진격했다. 이집트 공군은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됐다. 이스라엘은 불과 100시간 만에 시나이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영국·프랑스 공수부대가 운하 지역에 낙하했다. 군사적으로 이것은 교과서적 작전이었다.

이긴 자가 잃은 것: 제국과 함께 오염된 이미지

그러나 전장 바깥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폭탄이 터졌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격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전 통보조차 없이 행동했고, 이것은 냉전 최전선에서 소련에게 절호의 선전 도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더 나쁜 것은 타이밍이었다 — 꼭 같은 시기, 소련이 헝가리 혁명을 탱크로 진압하고 있었다. 서방이 이집트를 침공하는 순간, 서방의 도덕적 비판이 공허해졌다.4

아이젠하워는 즉각 영국·프랑스·이스라엘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도 핵 위협까지 동원하며 개입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을 실제로 무릎 꿇린 것은 군사 압박보다 경제 압박이었다. 미국은 영국의 IMF 긴급 차관 요청을 거부했고, 보유한 파운드화를 시장에 매각하겠다고 위협해 영국의 외환 보유고를 직접 겨냥했다. 파운드화 환율이 폭락 직전까지 몰렸다. 제국의 위신이 아니라 제국의 지갑이 흔들리자 영국은 굴복했다. 수에즈는 달러의 무기화(weaponized dollar)로 결판난 전쟁이었다 — 그리고 이 순간, 지중해의 패권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미·소 냉전 구도로 완전히 이전됐음이 확인됐다. 이스라엘은 점령한 시나이반도에서 물러났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패배로 뒤집힌 것이다.

이 사건이 이스라엘에 남긴 상처는 영토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아랍 세계 전체가 이스라엘을 서구 제국주의의 하청업자로 규정하는 서사가 고착됐다. 나세르는 군사적으로는 패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영웅이 됐다. 철수를 강요당한 굴욕이 오히려 그를 아랍 민족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었다. 아랍 민족주의의 불길은 더 높이 타올랐다. 이스라엘은 승리의 전리품 없이 적의 증오만 키운 전쟁을 치른 셈이었다.

수에즈는 제국주의의 황혼을 알리는 종이었다. 영국은 이 전쟁 이후 중동의 지배자 자리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미국과 소련이 채웠다. 중동의 판이 바뀌었고, 이스라엘은 이제 미국이라는 단 하나의 보호자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1967년 — 찬란한 6일, 끝나지 않는 60년

1960년대 중반, 중동의 긴장은 다시 임계점을 향해 달렸다. 나세르는 시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이스라엘 공격이 빈번해졌다. 1967년 5월, 나세르는 이집트군을 시나이반도에 집결시키고 유엔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아카바만을 봉쇄해 이스라엘의 해상 접근로를 차단했다. “우리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섬멸이다”라는 나세르의 연설이 아랍 세계 라디오에서 울려 퍼졌다.

이스라엘은 기다리지 않았다.

6시간의 기습: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제타격

1967년 6월 5일 아침 7시 45분(이스라엘 시간). 이스라엘 공군 전폭기 196대가 동시에 이륙했다. 목표는 이집트 공군 기지. 조종사들은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지중해를 우회해 저고도로 접근했다. 이집트 조기경보 시스템은 이들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집트 공군 장성들이 출근하는 시간대를 노린 기습이었다.

결과는 경이로웠다. 단 6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 304대가 지상에서 파괴됐다. 항공 전력을 잃은 이집트는 이미 전쟁에서 진 것이었다.5 이스라엘은 뒤이어 요르단·시리아 공군도 같은 방식으로 격파했다. 3개국 공군이 하루 만에 사실상 무력화됐다. 지상전은 6일 동안 벌어졌다. 1967년 6월 10일, 유엔의 정전 요구가 받아들여졌을 때 이스라엘은 기존 영토의 3배가 넘는 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시나이반도(이집트), 가자지구(이집트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지구(요르단), 골란고원(시리아), 그리고 동예루살렘. 유대인들이 2천 년간 기도로 불러온 도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울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긴 자가 삼킨 독: 인구학적 딜레마

그러나 환호가 가라앉을 무렵, 냉정한 계산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이 새로 장악한 땅에는 1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인구였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바루크 키멀링(Baruch Kimmerling)은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삼킬 수 없는 거대한 먹이를 삼킨 순간.”

문제는 간단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싶었다 — 유대인 국가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 그런데 새로 점령한 땅의 인구를 함께 끌어안는 순간, 이 두 정체성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시나리오를 두 가지로 나눠 보면 딜레마의 구조가 드러난다.

점령지를 합병하고 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면 — 팔레스타인 인구의 높은 출산율로 인해 머지않아 이스라엘 내 아랍계 인구가 유대인을 초과한다. 민주적 선거를 치르면 유대인 국가의 정체성이 인구학적으로 해체된다.

점령지를 지배하되 주민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다면 — 같은 땅 안에서 유대인 정착민은 이스라엘 법의 보호를 받고, 팔레스타인인은 군사 법원의 관할 아래 놓인다. 투표권도, 이동의 자유도 다르다. 이것은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이스라엘은 무언가를 잃는다. 유대 국가이거나 민주주의 국가이거나. 둘 다는 아니다. 이 트릴레마(Trilemma) — 유대 정체성, 민주주의, 영토 지배 중 동시에 두 가지만 가능한 구조 — 는 6일 전쟁 직후 이스라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예리하게 제기됐다.6

“우리는 땅을 지배하는 대가로 우리의 영혼을 잃어가고 있다.”
— 예샤야후 레이보비치(Yeshayahu Leibowitz), 이스라엘의 철학자·과학자, 1967년 6일 전쟁 직후의 경고. 레이보비치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음에도 점령이 이스라엘 민주주의를 부패시킬 것이라고 일관되게 경고했다.

하르툼 선언: 협상 불가능성의 제도화

6일 전쟁 직후,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하나의 선언으로 응결시켰다. 1967년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의는 이른바 ‘세 개의 거부(Three Nos)’를 채택했다.

이스라엘과 평화(Peace) 없다. 이스라엘의 승인(Recognition) 없다. 이스라엘과 협상(Negotiation) 없다.

하르툼 선언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었다. 6일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완패한 아랍 세계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언어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나중에 기밀 외교 문서를 열람해 밝혀낸 사실은 더 복층적이다. 선언의 이면에서 나세르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이미 조용한 타협의 언어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영토를 반환한다면, 외교적 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비공식 입장이었다. 강경 수사는 국내 강경파와 아랍 여론을 달래기 위한 포장이었다.7 결국 하르툼의 ‘세 개의 거부’는 완벽한 타협 불가 선언이 아니라 ‘굴욕적인 항복은 없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러나 문제는 그 거친 포장이 현실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강경파는 협상 불가능한 적이라는 인식을 굳혔고,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을 도덕적으로 압박할 외교 공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의도는 전술이었으나, 결과는 전략이 됐다.

6일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의 전략적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역설이 선명해진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더 넓은 땅을 가졌다. 그러나 그 땅은 다스릴 수 없는 인구를 함께 데려왔다. 아랍 세계는 완패했다. 그러나 그 패배는 협상 의지가 아니라 타협 불가의 증오를 낳았다. 전쟁이 끝났지만, 평화는 더 멀어졌다.

안보 딜레마: 더 강해질수록 더 위험해지는 구조

국제정치학에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라는 개념이 있다.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키우면, 이것이 주변국의 불안을 유발하고, 주변국도 군비를 늘린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더 무장했지만 모두가 더 불안해지는 역설이다.

이스라엘의 세 번의 전쟁은 이 딜레마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1948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건국에 성공했다 — 그러나 70만 난민을 만들었고, 그 난민들이 이후 모든 무장 저항세력의 인적 기반이 됐다. 1956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군사력을 증명했다 —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의 불길을 더 높이 지폈고, 나세르를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영토를 세 배로 늘렸다 — 그러나 그 땅이 통제 불가능한 인구 문제와 점령자의 도덕적 딜레마를 함께 가져왔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선택은 가혹했다. 점령지를 유지하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검문소, 야간 통행금지, 재산 몰수, 행정 구금. 이스라엘이 수십 년간 구축한 ‘민주주의 국가’의 이미지는 점령지에서 조금씩 벗겨졌다. 서구 자유주의 진영의 지식인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 지지를 보냈던 그들이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8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점령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1948년 이전,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러나 나크바와 난민 캠프, 그리고 1967년 이후의 점령 경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공통의 피해 경험과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의 정체성을 빚어냈다.

도덕적 자산의 파산

1948년 이전의 이스라엘 — 더 정확히는 이스라엘 건국 운동 — 은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도덕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2천 년의 박해, 홀로코스트의 충격,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생존자들. 서구의 여론은 유대인 국가 건설에 깊은 동정과 지지를 보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었다 — 아랍 연합이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작은 나라.

그러나 1967년 이후, 이 이미지는 천천히 역전됐다. 이스라엘은 수백만 명의 비유대인 주민을 시민권 없이 군사적으로 통치하는 점령 국가가 됐다.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인의 땅에 유대인이 이주해 오는 장면은, 1948년 이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목격한 알리야의 역사를 거울처럼 재연했다. 다윗이 골리앗이 됐다.

이것이 세 번의 군사적 승리가 남긴 가장 비싼 대가였다. 이스라엘은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영토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서 있던 도덕적 지반을 조금씩 잃어갔다. 국제사회에서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피해자를 만드는 구조 안에 편입됐다.

바라보는 자의 메모: 승리가 설계하는 다음 전쟁

세 번의 전쟁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이스라엘은 매번 전쟁에서 이겼고, 매번 그 승리가 다음 전쟁의 씨앗이 됐다. 1948년의 난민이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인적 기반이 됐다. 1956년의 나세르 신화가 1967년 전쟁 직전 아랍의 과신을 키웠다. 1967년의 영토 확장이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복수전 — 욤키푸르 전쟁 — 을 불렀다. 그리고 1967년 이후 심화된 점령과 정착촌 확대가 오늘날 가자와 서안지구의 만성 분쟁을 낳았다.

역사학자들은 이 구조를 ‘갈등의 자기 강화 메커니즘(self-reinforcing conflict mechanism)’이라 부른다. 한쪽의 안보 강화가 다른 쪽의 피해를 심화하고, 그 피해가 다음 공격의 동기가 되며, 그 공격이 다시 안보 강화를 정당화한다. 이 순환을 어디서 끊는가 — 그것이 모든 분쟁 해결의 핵심 질문이고, 중동에서는 아직 아무도 그 지점을 찾지 못했다.

한국이 이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중동 정세가 유가와 안보를 흔들기 때문만이 아니다. 분단과 강대국의 개입이라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이 이 구조를 읽는 렌즈가 된다. 승리가 반드시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적의 굴욕이 평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일과, 그것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평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정식이라는 것. 안보를 향한 맹목적 질주가 도리어 더 큰 안보 위협을 발명해낼 수 있다는 역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세 번의 승리는 안보가 아닌 더 복잡한 분쟁을 낳았다. 영토는 늘었으나 평화는 멀어졌다. 군대는 강해졌으나 정당성은 침식됐다. 적은 패배했으나 그 패배가 적을 더 많이 만들었다.

이것이 피로스의 왕관을 쓴 나라의 이야기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는 이 승리의 방심이 어떻게 1973년 10월 6일 —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날 — 에 탱크의 물결로 되돌아왔는지를 따라간다.


* 참고할 말씀: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 마태복음 26:52


각주 및 출처

1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암묵적 분할 합의: Avi Shlaim, Collusion Across the Jordan: King Abdullah, the Zionist Movement, and the Partition of Palestine (1988). 압둘라와 골다 메이어의 비밀 회동 등 요르단의 분리 전략이 상세히 분석됐다.

2 소련의 이스라엘 무기 지원: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우회 경로로 1948년 5~6월 Me-109 전투기 및 소화기류가 공급됐다. Benny Morris, 1948 (2008), Chapter 5. 소련은 1949년 이후 친아랍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3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 원인: Benny Morris, 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 Revisited (2004). 이스라엘 군 기밀문서를 열람한 이 연구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모리스 자신은 “추방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을 수 있으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복합적 입장을 취한다.

4 수에즈 위기와 미국의 경제적 압박: Diane Kunz, The Economic Diplomacy of the Suez Crisis (1991). 미국은 영국의 IMF 차관 신청을 거부하고 파운드화 매각을 위협해 영국의 금융 시스템을 직접 압박했다. 영국이 군사적으로 중단한 실효 원인은 이 경제 제재였다. 냉전·도덕 명분과 함께 검토: Kyle Keith, Suez: Britain’s End of Empire in the Middle East (1991).

5 6일 전쟁 이스라엘 공군 작전: Michael Oren, Six Days of War: June 1967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Middle East (2002).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 기습 ‘Operation Focus(מוקד)’는 170대의 이집트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요르단·시리아 공군 포함 총 격파 수는 약 450대.

6 이스라엘의 트릴레마: 이 개념은 정치학자 Yaron Ezrahi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식인들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국제관계학에서는 이스라엘의 ‘demographic dilemma’와 ‘democratic dilemma’로 분류된다. 현대적 정리는 Ian Lustick, Unsettled States, Disputed Lands (1993) 참조.

7 하르툼 선언의 이면: 1967년 9월 1일 채택. 아랍 8개국 정상이 서명. 외면적 강경 수사와 달리 내부적으로 나세르와 후세인 국왕이 ‘영토 반환 전제의 외교 해결’을 타진했다는 재해석은 Avi Shlaim,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2000) 참조. 이후 이집트(1979)·요르단(1994)이 각각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하르툼 선언의 수사와 실제 외교 행동 사이의 간극이 역사적으로 확인됐다.

8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서구 좌파의 이반: 1967년 이후 유럽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비판이 시작됐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0년대까지 이스라엘 지지 입장이었으나 점령 이후 복잡한 태도를 보였다. Noam Chomsky, The Fateful Triangle (1983)은 이 시기 이후 미국 좌파의 이스라엘 비판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앞선 글에서 우리는 2천 년의 디아스포라와 영국의 세 가지 약속이 어떻게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대재앙을 낳았는지 살펴보았다. → 땅을 기억하는 자들의 나라

【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① 땅을 기억하는 자들의 나라 (B.C. 2세기~1948)

② 이긴 자가 잃은 것들 (1948·1956·1967) — 현재 글

③ 속죄의 날 탱크가 쏟아졌다 (1973) — 예정

④ 배신자라 불린 평화주의자 (1978·1981) — 예정

⑤ 직접 싸우지 않는 전쟁 (1987~2023) — 예정

⑥ 트럼프는 중동을 멈출 수 있는가 (2025~2026) —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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