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긴다는 것 — 101년, 신라가 성 안으로 들어간 이유
[2부] 팽창기 (A.D. 53~146년) · 태조왕의 세기
2026.07.15 · 역사·철학 · 한국사 시리즈
2026년 여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올라왔다. 세종시를 이름뿐인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바꾸겠다는 법안이다.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의사당의 완전 이전까지 거론된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을 근거로 위헌 결정을 내렸던 그 논쟁이 20여 년 만에 다시 국회 문턱에 올라섰다.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자꾸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권력의 자리를 옮긴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이사로 보기 어렵다.
권력이 스스로 “여기가 중심이다”라고 선언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 선언은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동반한다 —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그곳인가.
1,925년 전, 신라에서도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101년 봄, 금성에서 월성으로
파사이사금 22년(101년) 2월, 신라 왕실은 금성 동남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지었다. 반달 모양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이 성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의 중심으로 남는다.
같은 해 7월, 왕은 실제로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¹.
이 결정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직전 수년간 신라는 불안정했다. 96년 가야가 남쪽 변경을 습격해 성주가 전사했고, 100년 겨울에는 수도(금성)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했다(삼국사기).
외부의 군사적 압박과 내부의 자연재해가 겹치는 시기, 왕은 방어에 유리한 새로운 성을 쌓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옮긴다는 것은 이 경우, 확장이 아니라 응집으로 읽힐 수 있다.
다만 고고학 발굴 성과는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2021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서성벽 조사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월성 성벽의 본격적인 축조 시기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로 추정되는 물증이 확보되었다².
문헌의 101년과 고고학의 4세기 사이에는 약 250년의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며, 이 글은 그중 어느 하나를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신라인들 스스로가 “우리는 101년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기억하고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기억된 역사와 발굴된 역사가 어긋날 때,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쪽이 맞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는가”일지도 모른다.
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정반대의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101년,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 원정에 나섰다.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맺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잊지 않고 있었고, 트라야누스는 즉위하자마자 그 설욕을 위해 국경 너머로 군단을 이끌고 나갔다. 같은 해 벌어진 제2차 타파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를 꺾었다³. 이 원정은 이후 106년, 다키아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키는 데까지 이어진다.
101년, 신라는 성벽 안으로 들어갔고 로마는 국경 밖으로 나갔다. 하나는 응집이었고 하나는 팽창이었다. 그러나 두 결정 모두, 권력이 스스로의 자리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성 안에 앉은 권력, 흩어지지 않는 권력
한비자는 권력의 문제를 언제나 ‘자리(位)’의 문제로 보았다⁴.
势不足以化则除之(세부족이화즉제지)
“위세가 교화하기에 부족하면 이를 제거해야 한다”
그의 사상 밑바닥에는, 권력이란 흩어져 있으면 반드시 잠식당한다는 냉정한 전제가 깔려 있다. 왕이 성 밖에 흩어진 채로 머문다면, 그 권위 역시 흩어지기 쉽다. 한비자적 시각에서 월성 축조는 권력을 한 자리에 모아 지키려는, 지극히 계산된 정치 행위로 읽힐 수 있다.
서양에서는 토머스 홉스가 비슷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다뤘다⁵.
“주권자의 자리가 하나로 확정되지 않으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리바이어던』
주권의 자리가 흔들리면 질서 자체가 흔들린다는 논리다. 왕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가 불분명한 나라는, 결국 누가 다스리는지도 불분명한 나라가 되기 쉽다.
파사이사금이 한비자를 읽었을 리도, 홉스를 알았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의 논리는 두 사상가가 수백 년, 수천 년의 시차를 두고 각자 도달한 결론과 겹친다.
권력은 자리를 정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 — 이것이 동서양 사상이 각기 다른 언어로 도달한 하나의 지점이다.
두 개의 101년
101년의 신라와 101년의 로마를 나란히 놓으면, 국가가 위기를 넘기는 방식에는 최소한 두 갈래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하나는 밖으로 나가 새로운 땅을 취함으로써 위기를 흡수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안으로 들어가 중심을 굳힘으로써 위기를 견디는 방식이다.
로마는 전자를 택해 최대 판도를 넓혔으나, 이러한 확장이 오히려 게르만족을 자극해 ‘3세기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신라는 후자를 택해 이후 천 년에 가까운 세월, 월성을 한 번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팽창은 화려하지만 반드시 되갚아야 할 빚을 남긴다. 응집은 느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리를 남긴다.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이 글은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두 방식 모두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2026년의 한국은 그 오래된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행정수도 세종 완성을 향한 특별법 논의가 국회에서 재점화되었고,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의사당의 완전한 세종 이전까지 정치권 일각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고 있다⁶.
이것은 이념이나 진영의 문제를 떠나, 국가가 스스로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파사이사금이 101년에 마주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질문이다.
권력의 자리를 옮기는 결정은 언제나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 지금의 자리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냉정한 인정, 그리고 새로운 자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이 내려진 천도는, 역사 속에서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어디에 앉을 것인지 묻는다
월성은 완성된 뒤 천 년 가까이 신라 왕들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첫 삽을 뜬 101년의 파사이사금은, 자신이 세운 성이 그토록 오래 남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 순간, 지금의 자리로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자리를 옮긴다는 결정은 그 순간에는 늘 불확실했을 것이며,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아주 오랜 훗날에야 드러날 뿐이라는 점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그런 결정이 논의되고 있을 것이다. 그 결정이 후대에 어떤 자리로 기억될지,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87년, 신라가 방어의 정치학을 택했던 순간을 살펴보았다 — 이번 편은 그 연장선에서, 방어가 결국 ‘자리의 확정’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다룬다.
* 참고할 말씀: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히브리서 13:14
¹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 (17년~22년 기사)
²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월성 서성벽 발굴조사 결과 (2021)
³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제2차 타파이 전투 (101년)
⁴ 한비자, 세(勢)에 관한 논지
⁵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 주권자의 자리에 관한 논지
⁶ 2026년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관련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논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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