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식과 베를 나누어준 왕 — 100년, 책성의 민심을 담다
삼국의 시간 2-고구려-⑨ | 정복 이후에 남는 질문 — 백성은 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2026년 6월 · 역사·한국사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서기 94년 봄, 태조왕이 직접 말에 올라 동쪽 끝 책성을 향해 떠났고 98년 겨울에야 돌아온 이야기를 살폈다. 4년의 시간, 수도를 비운 왕이 변경에서 무엇을 확인하려 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남겨진 질문이 있었다. ☞ 600리 길을 왕이 직접 간 까닭 — 태조왕의 책성 순행, 서기 94~98년
100년, 왕이 다시 책성에 있었다
98년 겨울, 태조왕은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나온 길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도로 돌아온 왕의 발이 아직 길의 흙먼지를 채 씻지 못했을 무렵, 사료는 새로운 장면을 열기 시작한다.
서기 100년, 태조대왕 48년. 《삼국사기》는 짧지만 밀도 있는 기록 하나를 남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8년 (서기 100년)
“봄 정월에 왕이 책성에 이르러 군사를 위무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베를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1
원문: 春正月,王至柵城,撫恤軍士,賜民戶租布有差.
98년에 돌아왔고, 100년에 다시 책성에 있었다. 왕은 돌아온 지 2년 만에 다시 동쪽을 향했거나, 아니면 귀환 이후에도 사신이나 관리를 보내 연이어 챙긴 끝에 다시 한 번 직접 책성에 이른 것이다. 사료는 이 여정의 시작점을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도착한 사실과 그 자리에서 한 일만을 남긴다.
그리고 그 한 일이, 이 기록을 단순한 이동 일지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撫恤과 賜 — 두 동사가 말하는 것
기록 속에서 태조왕은 두 가지를 했다. 군사를 위무(撫恤)했고, 백성에게 조포(租布)를 내렸다.
위무(撫恤)는 어루만져 돌본다는 뜻이다. 무(撫)는 손으로 쓰다듬는 형상의 글자다. 군주가 전장에 나선 병사들을 위무한다는 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감수하며 서 있는지를 왕이 직접 본다는 의미다. 보여지는 자가 아니라 보러 간 자 — 그것이 위무의 본질이다.
조포(租布)는 곡식과 베, 즉 실물 생필품이다. 조(租)는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포(布)는 삼베나 모시처럼 교환재로 쓰이던 천을 가리킨다. 당시 변경 사회에서 베는 화폐 대용으로 통용되던 가장 실질적인 자산이었다.1a 그리고 “차등 있게(有差)” 나누었다고 기록한다. 유차(有差)라는 표현이 묘하다. 일률적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기준이 신분별이었는지, 가구 규모별이었는지, 공로에 따른 것이었는지 — 사료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일정한 기준에 따라 차등 지급이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분배는 무작위 살포와 구별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행위의 성격이다. 태조왕의 조포 분배는 단순한 시혜성 선물이 아니었다. 새로 편입된 변경 지역을 고구려의 행정 체계 안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통치 비용의 지출이었다. 정복은 군사력으로 시작되지만, 그 이후 드는 비용은 칼이 아니라 곡식과 베로 지불된다. 태조왕은 그 비용을 직접 들고 왔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관정요(貞觀政要)》 권1, 〈군도(君道)〉 — 당 태종(唐太宗)
水能載舟,亦能覆舟。
수능재주,역능복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또한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2
책성의 백성들은 물이었다.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 고구려의 언어와 질서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변경의 주민들. 그들이 태조왕의 배를 띄울 것인가, 뒤집을 것인가 — 그 분기점에 100년의 책성이 있었다.
미시사 — 책성의 한 가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
사료는 왕의 행위만 기록한다. 받는 쪽은 침묵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 역사가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조건 위에서.
책성의 어떤 가구를 생각해보자. 고구려의 동북 변경이 된 이 지역에는 동옥저계 주민, 숙신(肅愼)계 집단, 고구려 초기 이주민 등 다양한 출신이 섞여 살고 있었을 것이다.3 어떤 출신이든 공통점은 하나였다 — 고구려의 법이 적용되고, 세금이 부과되고, 군역이 요구되는 새로운 질서 아래 살아가는 삶. 그것이 더 좋은 것인지 이전이 나았는지를 판단할 기준도 마땅치 않은 삶.
100년 정월, 왕이 왔다. 곡식과 베가 나누어졌다. 이 가구의 가장은 그날 무엇을 느꼈을까. 고구려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인가. 아니면 이 나눔이 다음 해 더 많은 세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불안인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왕을 직접 보았다는 기억은 남는다. 이름으로만 알던 존재가 실제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 나라와 나 사이의 거리는 줄어든다. 심리적 거리의 단축 — 이것이 순행이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효과였다.
미시사(microhistory) 연구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경험을 복원함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다.4 책성의 이름 없는 가구들이 100년 정월을 어떻게 기억했는가 — 그 기억의 총합이 고구려의 동쪽 국경이 얼마나 견고해지는가를 결정했다.
물론 조포 분배가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책성 주민들이 이를 환영했는지, 혹은 국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의무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사료는 침묵한다. 역사는 종종 통치자의 행위를 기록하지만, 그 행위를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 침묵이 바로, 우리가 100년 정월을 단정 대신 질문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거시사 — 100년의 동아시아, 고구려는 어디에 서 있었나
서기 100년은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하던 시기다. 한(漢)나라는 광무제의 중흥으로 후한(後漢) 시대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화제(和帝, 재위 88~105년) 치세 말기로 접어들며 외척과 환관 세력이 점차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방의 강족(羌族)과의 충돌이 반복되었고, 북방의 흉노가 분열되어 남흉노와 북흉노 사이의 재편이 진행되고 있었다.5
고구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기회이자 압박이었다. 약해지는 한나라는 고구려의 서쪽 팽창에 틈을 주는 동시에, 분열된 북방 세력들이 남하할 경우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동쪽 책성을 안정시키는 일은 이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후방을 다지는 전략적 행위였다.
태조왕이 100년에 책성에서 수행한 민심 안정 작업은, 거시사적으로 보면 고구려가 단순한 팽창 세력에서 영토를 관리하는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의 핵심 고리였다. 정복은 전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복된 지역이 스스로 그 나라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 완성된다. 태조왕은 그 시점을 100년으로 잡았다.
같은 시기, 서쪽 로마 제국에서는 네르바-안토니우스 왕조가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열고 있었다. 트라야누스(Trajanus, 재위 98~117년)가 황제에 오르며 로마는 다키아와 파르티아 원정으로 최대 영토를 구가하는 한편, 정복지 관리와 행정 체계 정비라는 같은 과제 앞에 서 있었다.6 정복과 통합이라는 이 보편적 문제는, 서기 100년이라는 동일한 시간대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동서양의 비교 — 정복자가 세금 대신 곡식을 들고 올 때
피정복지에 왕이나 황제가 직접 찾아와 물자를 나누어주는 행위 — 역사에서 이것은 반복된 패턴이다.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년)은 4군 6진을 개척한 뒤 북방 변경 주민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이른바 사민정책(徙民政策)과 함께 적극적인 위무 정책을 폈다. 남방에서 이주시킨 백성들에게는 수년간의 세금을 면제해주었고, 현지 여진족 출신의 토착 유력자들을 토관(土官)으로 임명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동시에 행정 체계 안으로 끌어들였다.7 세금 감면과 관직 수여 — 두 가지 모두 “너희는 이제 우리의 일부”라는 신호를 다른 언어로 보내는 것이었다.
멀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재위 BC 559~530년)이 있다. 그는 바빌론을 정복한 뒤 피정복민을 억압하는 대신,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각 민족이 자신의 신을 섬기도록 허용했다. ‘키루스 칙령’으로 알려진 이 선언은 현대에는 인권의 선구적 사례로 자주 언급되지만, 그 성격과 의도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도 존재한다.8 다만 강제가 아닌 포용으로 제국을 묶으려 했다는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 태조왕의 조포 분배는 그 논리와 같은 줄기 위에 놓인다.
차이가 있다면 규모다. 키루스의 칙령은 제국 전체를 향한 선언이었고, 태조왕의 분배는 두만강 유역의 한 변경 도시를 향한 실물 행위였다. 그러나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선언의 크기보다 실천의 구체성이다. 곡식과 베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해 겨울을 버티게 하는 물건이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물음 — 포용은 시혜인가, 설계인가
100년의 책성을 오늘로 가져오면 어떤 풍경이 겹쳐지는가.
한국 사회는 수십 년 동안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불균형을 안고 살아왔다. 청년 인구가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지방 도시는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다. 이 구조 속에서 “지방에도 투자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은 무수히 나왔다. 그러나 실제 실물 — 일자리, 교육, 의료 — 이 지방 주민의 삶을 바꾼 사례는 선언의 수에 비해 드물다.
태조왕의 조포 분배는 선심성 베풂이 아니었다. 변경 지역을 고구려 체제 안으로 연착륙시키기 위한 정무적 조율이었고, 그 비용을 왕이 직접 부담했다는 선언이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 인프라나 제도 설계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국가가 변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물로 증명한 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말이 아니라 곡식과 베로, 선언이 아니라 현장으로.
세계적으로는 다른 버전의 책성 문제가 있다. 이민과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 국가들이 직면한 질문 — 새로 편입된 구성원들이 그 사회의 일부라고 느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 실험을 하고 있다. 어떤 나라는 언어 교육과 시민권 취득 경로를 열었고, 어떤 나라는 그 문을 좁혔다. 책성의 사례는 새로운 구성원을 공동체 안으로 통합하는 문제가 오래된 역사적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그 과제에 대한 답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열려 있다.
맹자가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손과 발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배와 심장처럼 여긴다고. 그 논리는 방향을 바꾸어도 성립한다. 국가가 변경의 구성원을 자국민처럼 여기면, 그 구성원은 국가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100년 책성에서 시작된 그 순환이, 이후 고구려가 700년 가까운 국가 체계를 유지한 뿌리 중 하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곡식과 베 이후 — 남겨진 질문
100년 정월, 왕이 책성을 떠난 뒤 남은 것은 곡식과 베만이 아니었다.
왕을 본 기억이 남았다. 나누어 받은 물건이 다 쓰인 뒤에도, “왕이 왔었다”는 이야기는 남는다. 그 이야기가 다음 세대로 전해질 때, 책성은 단지 행정 구역이 아니라 왕이 직접 발걸음한 땅이 된다. 장소는 그렇게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바라보는 자는 하나의 물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태조왕이 책성을 다녀간 뒤 46년, 그는 퇴위를 강요당한다. 차대왕이 즉위하고, 통합의 시대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한 사람의 탁월한 실천이 구조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사라질 때 실천도 사라진다. 태조왕이 책성에 심은 것이 씨앗으로 남았는지, 아니면 그의 재위기에만 피었다 진 꽃이었는지 — 그 물음은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 참고할 말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룻기 1:16
1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48년(서기 100년) 조. 원문: “春正月,王至柵城,撫恤軍士,賜民戶租布有差.” 1145년 편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원문 참조.
1a 고대 사회에서 포(布)의 화폐적 기능: 고대 동아시아에서 베(布)는 세금 납부 수단이자 교환 매개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참고: 이기동, 〈삼국시대의 수취 체제〉, 《한국고대사연구》 12 (한국고대사학회, 1997).
2 오긍(吳兢), 《정관정요(貞觀政要)》 권1, 〈군도(君道)〉. 원문: “水能載舟,亦能覆舟.” 서기 8세기 초 편찬. ※ 이 구절의 연원은 《순자(荀子)》 〈왕제(王制)〉에서 유래했으며, 당 태종이 즐겨 인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3 책성 지역의 주민 구성: 책성 일대는 동옥저 복속(56년) 이후 고구려의 동북 변경으로 편입되었으나, 이 지역에는 동옥저계 외에 숙신(肅愼)계 집단과 초기 이주민 등이 혼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 제4장;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모시는사람들, 2005), 제2부 참조.
4 미시사(microhistory) 방법론: Carlo Ginzburg, The Cheese and the Worms, trans. John and Anne Tedeschi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0); Giovanni Levi, “On Microhistory,” in Peter Burke (ed.), New Perspectives on Historical Writing (Penn State University Press, 1991), pp. 93~113. 본문의 서술은 이 연구 전통의 일반적 방법론을 요약한 것으로, 특정 문장의 직접 인용이 아님을 밝힌다.
5 후한 화제 시기 동아시아 정세: 범엽(范曄), 《후한서(後漢書)》 권4, 〈화제기(和帝紀)〉. 5세기 편찬. 강족(羌族) 관련 기록 수록.
6 트라야누스 황제의 로마 제국 경영: Cassius Dio, Roman History, Book 68 (서기 3세기 편찬). 참고: Julian Bennett, Trajan: Optimus Princeps (Routledge, 1997), pp. 85~120.
7 조선 세종의 4군 6진 사민정책 및 위무: 《세종실록(世宗實錄)》 15~32년 조 관련 기사. 참고: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 2004), 제4부; 토관(土官) 제도 및 세금 감면 정책 수록.
8 키루스 대왕의 칙령: 기원전 539년 바빌론 정복 후 반포. ‘Cyrus Cylinder'(키루스 원통문서),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 참고: A. Kuhrt, “The Cyrus Cylinder and Achaemenid Imperial Policy,”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25 (1983), pp. 83~97. ※ 이 문서를 인권 선언의 선구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제국의 정치적 정당화 수단으로 보는 학술적 반론도 존재한다: Amélie Kuhrt, “The Achaemenid Persian Empire,” in S. E. Alcock et al. (eds.), Empir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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