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라 불린 평화주의자

【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④ / 6편

배신자라 불린 평화주의자

— 1978·1981년, 평화가 지도자를 죽이다

2026년 6월 · 세계사 · Watchman

1981년 10월 6일. 카이로 외곽의 열병식장.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단상에 앉아 군대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개전 8주년이었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건넌 날. 사다트가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그날의 기념일이었다.

트럭 한 대가 행렬에서 이탈했다.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뛰어내렸다.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 중위가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들어 사다트를 향해 쏘았다.

총성이 멈춘 뒤, 이슬람불리는 외쳤다. “나는 파라오를 죽였다!”

사다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를 죽인 것은 적이 아니었다. 같은 군복을 입은 자국의 병사였다.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알 지하드’의 조직원들이었다. 그들이 사다트에게 붙인 죄목은 하나였다. 이스라엘과 평화를 맺은 자. 배신자.

사다트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3년 전, 메릴랜드주의 한 대통령 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앞으로, 1977년 1월 카이로의 거리로 가야 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사다트에게 협상의 명분을 안겨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편은 그 명분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따라간다.

총성보다 먼저 온 것 — 굶주림과 빵 폭동

1977년 1월 18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군중이 거리로 쏟아졌다. 정부 청사, 경찰서, 고급 호텔에 불이 붙었다. 이틀 동안의 폭동으로 79명이 숨지고 550명이 다쳤다.1

발단은 빵이었다. IMF의 권고를 받아들인 사다트 정부가 밀가루·설탕·식용유 보조금을 삭감하자, 이집트 민중이 폭발했다. 후에 ‘1월 18·19일 폭동’, 흔히 ‘빵 폭동(Bread Riots)’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사다트 체제를 근저에서 흔든 순간이었다.

사다트는 보조금 삭감을 즉각 철회했다. 그러나 더 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집트 경제는 이미 출혈이 심각한 상태였다. 1948년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이 국가 재정을 갉아먹었다. 국방비가 GDP의 30%를 넘나들었다. 소련의 군사 원조는 끊겼고 채무는 쌓였다. 사다트는 측근들에게 말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싸울 돈도, 먹을 빵도 없다.”

같은 해 11월, 사다트는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 연단에 섰다. 아랍 지도자 최초였다. 열광적인 국내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단의 이면에는 이념보다 절박한 현실이 있었다. 자국 민중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면 체제가 무너진다는 판단. 평화는 고상한 선택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삼각 드라마: 캠프 데이비드의 13일

1978년 9월 5일, 미국 메릴랜드주 캐톡틴 산 속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세 사람이 모였다.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카터는 이 회담을 ‘3일이면 충분할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는 13일이 걸렸다.

사다트와 베긴은 서로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카터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한쪽 오두막에서 다른 쪽 오두막으로 걸어가며 합의안을 조율했다. 훗날 카터의 회고록은 이 13일을 “내 생애 가장 소진된 시간”이라 기록했다.2

베긴은 법률가 출신이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졌다.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 팔레스타인 자치권 문구, 시나이반도 반환 일정 — 모든 조항이 협상의 전쟁터였다. 어느 날 밤, 베긴은 최종 결렬을 선언하고 짐을 쌌다. 카터는 공항으로 향하려는 베긴을 붙잡았다. 카터의 손자녀들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 “이 아이들의 세계를 위해 남아주십시오.” 베긴은 돌아섰다.

사다트는 애초부터 달랐다. 그는 협상가라기보다 전략가였다. 시나이반도를 돌려받는 것, 그리고 미국의 경제·군사 지원을 확보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목표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 동료 아랍 지도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여기는 그 문제는 — 사다트의 협상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었다.

9월 17일, 협정이 서명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단계적으로 반환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다. 이듬해 3월, 워싱턴에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31년 만에, 아랍 국가가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사다트와 베긴은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아랍 세계는 분노했다.

맹주가 대열에서 이탈하다 — 세력균형의 붕괴

사다트가 카이로에 돌아왔을 때, 거리는 조용했다.

아랍연맹(Arab League)은 본부를 카이로에서 튀니스로 옮겼다.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제명됐다. 1945년 창설 이래 아랍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집트가, 단 하나의 결정으로 고립됐다.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이집트와 단교했다. 사다트에게는 다양한 이름이 붙었다. 변절자. 협잡꾼. 시오니스트의 앞잡이. 파라오.

파라오는 이슬람 이전의 이집트를 지배하던 전제 군주다. 성경과 꾸란이 공유하는 세계관 속에서 파라오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억압하다 홍해에서 멸망한 자다. 출애굽기의 그 파라오. 한국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그 이름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신의 뜻을 거스른 배교자의 상징이었다. 사다트는 유대인 국가와 손을 잡음으로써 바로 그 저주받은 자리에 세워졌다. 그를 파라오라 부른 것은 모욕이자 종교적 사형 선고였다.

그러나 이 분노의 이면에는, 사다트의 선택이 불러온 더 깊은 지정학적 변화가 있었다.

중동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 아랍 세계의 맹주 이집트가 전선에서 이탈함으로써 중동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근본적으로 깨졌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가장 두려워했던 양면 전쟁 — 남부의 이집트, 북부의 시리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구도 — 의 공포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났다. 남부 전선이 봉인되자, 이스라엘은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목표는 레바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PLO의 소탕이었다. 남부 전선이 봉인되자, 이스라엘 내 강경파들은 주저 없이 군사력을 북부로 집중할 수 있었다.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의 공세적 구상이 메나헴 베긴 정부의 정치적 의지와 맞물렸고, 이집트가 전선에서 이탈한 전략적 공백이 그 결정에 날개를 달았다. 이집트의 평화는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의 독주를 선물했다.

1950년대~60년대 아랍 세계를 지배한 이념은 나세르주의(Nasserism)였다.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 “아랍은 하나다. 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 그 신화가 1967년 6일 전쟁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집트의 단독 평화조약은 그 잔해를 완전히 쓸어버렸다. 세속적 민족주의가 답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이슬람. 무슬림형제단, 알 지하드, 그리고 이란에서는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실패한 세속주의의 자리를 이슬람 원리주의가 채워가고 있었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사다트는 시대를 앞섰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부메랑을 맞을 시대를 읽지 못했던 것인가.

철학이 묻는 것 — 명분과 실리의 전쟁

전국시대 말기 초(楚)나라에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강대국 진(秦)나라와 화친을 맺으라는 압박이 거셌다. 실리파는 말했다. “진나라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잠시 굴복하더라도 나라를 보전해야 한다.” 굴원은 끝까지 반대했다. 불의와의 타협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는 결국 조정에서 추방됐다. 그리고 멱라수(汨羅水) — 지금의 중국 후난성(湖南省)을 흐르는 강 — 에 몸을 던졌다.

사다트는 굴원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했다.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시나이반도를 돌려받고, 미국의 지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굴원과 사다트, 두 사람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둘 다 동시대인들에게 버림받았다. 굴원은 이상주의 때문에, 사다트는 현실주의 때문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다트가 놓인 구조적 딜레마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집권 초기, 세속적 좌파와 나세르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세력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사면하고, 활동을 허용하고, 정치적 공간을 내어줬다. 당시의 논리로는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내부의 적을 길들여 외부의 적에 쓰려 했다. 그러나 그 세력은 통제를 벗어났고, 결국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것이 착오였는지, 아니면 어떤 선택을 해도 피하기 어려운 구조적 함정이었는지는 — 역사는 아직 판결을 유보하고 있다.

知人者智,自知者明。勝人者有力,自勝者強。
(지인자지,자지자명。승인자유력,자승자강。)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자는 밝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강하다.”
— 노자(老子), 《도덕경》 33장

사다트는 적을 알았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 미국이 원하는 것, 냉전 구도가 허용하는 것. 그것을 꿰뚫었다(勝人者有力). 그러나 그는 자신이 키운 괴물의 깊이를 오판했다. 이슬람 세력을 도구로 삼아 외부의 적을 무력화하는 데 몰두하느라, 그 도구가 자신에게 겨눌 칼날이 됐을 때를 내다보지 못했다. 적의 생리는 꿰뚫었으되, 자국 내부의 모순과 자신이 허용한 공간의 깊이를 알지 못했으니 — 스스로를 아는 밝음(自知者明)이 부족했던 것이다. 적을 이용해 적을 제압하려다, 이용한 적에게 제압당했다.

서양 전통에서 이 문제를 냉정하게 직시한 사람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유가 주어질 때가 아니라, 기대가 현실을 앞지를 때라고 봤다. 아랍 민중이 기대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이었다. 사다트가 협상으로 얻어낸 것은 시나이반도였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분노가 됐고, 분노는 총구가 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 배신자라 불린 사람들

사다트만이 아니었다. 역사는 이 자리를 여러 번 채웠다.

1921년 아일랜드, 마이클 콜린스.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이끈 IRA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조약에 서명했다. 아일랜드 32개 주 가운데 북아일랜드 6개 주를 영국에 남기는 조건으로, 나머지 26개 주의 독립을 얻는 불완전한 타협이었다. 조약에 서명하던 날, 콜린스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의 사형 영장에 서명했다.” 이듬해, 그는 아일랜드 내전 중 자국 강경파의 총에 맞아 숨졌다. 향년 31세.3

콜린스의 구조와 사다트의 구조는 놀랍도록 닮았다. 둘 다 외부의 적이 아닌, 같은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둘 다 ‘불완전하지만 지금 가능한 평화’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죽었다.

조선 인조 시기, 최명길(崔鳴吉).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했다.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 앞에서 조정은 두 진영으로 갈렸다. 척화파(斥和派)는 말했다. “청나라 오랑캐에게 절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말했다. “나라가 살아야 명분도 있다.” 그는 직접 항복 문서를 썼다. 당대의 사림(士林)은 그에게 침을 뱉었다.

최명길은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쓴 항복 문서는 나라를 구하는 글이었다. 이 글이 욕되다면, 그 욕됨을 나 혼자 받겠다.”4

1947년 조선반도, 여운형(呂運亨). 해방 직후 분단의 기운이 짙어지던 시절,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단독정부 수립을 막으려 했다. 이승만 계열 우익에게는 “공산주의 협력자”로, 좌익 강경파에게는 “미제의 앞잡이”로 동시에 불렸다. 양쪽 극단 모두에게 배신자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그는 우익 성향 청년의 총에 암살됐다. 중간의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자국인의 총에 쓰러졌다.5

1949년 서울 경교장, 김구(金九).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하고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고 돌아온 그에게, 총구는 뜻밖의 방향에서 날아왔다. 청년 장교 안두희의 권총이었다. 안두희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확고한 반공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김구의 남북 협상을 민족의 배신으로 규정했고, 스스로 옳다고 믿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명령이 아닌 신념의 총이었다. 그것이 더 무겁다. 조직의 명령은 거부할 수 있지만, 자신의 신념은 스스로 멈추기 어렵기 때문이다.6

1952년 피란 수도 부산, 이승만(李承晩).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식이 열리던 부산 충무동 광장. 단상에서 연설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졌다. 의열단 출신 전직 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의 권총이었다. 총은 불발됐다. 이승만은 살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정치적 단죄의 방식은 선거가 아닌 총구였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권력의 중심에 선 자는 언제나 내부의 총구 앞에 서야 했다.7

사다트, 콜린스, 최명길, 여운형, 김구, 이승만. 이름도 진영도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 하나다. 권력의 중심에 선 자든, 중간의 길을 걸은 자든 — 총구는 언제나 내부에서 날아왔다. 그리고 그 총구를 쥔 자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정의(正義)라 믿었다.

절반의 합의가 남긴 것 — 팔레스타인, 그리고 현재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성취한 것은 분명했다. 이집트-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나이반도는 1982년 이집트로 돌아왔다. 지미 카터의 외교적 성취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으로 지금도 평가된다.

그러나 협정이 외면한 것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이었다.

캠프 데이비드 합의문에는 팔레스타인 자치(autonomy)에 관한 조항이 포함됐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약속이 아니었다. ‘협상할 것이다’는 선언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조항을 실질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더욱 강경해졌다. 1982년 레바논 침공으로 PLO를 소탕했고, 1987년에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대규모 봉기인 제1차 인티파다가 터졌다.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합의는, 다음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 씨앗이 어디까지 자랐는지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이 보여주었다. 2007년 이후 봉쇄된 가자지구에서, 캠프 데이비드가 외면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누적이 폭발했다. 45년 전 사다트가 서명한 협정이 남긴 구조적 공백이 2023년의 총성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은, 역사의 결을 따라갈 때 외면하기 어렵다.

캠프 데이비드는 가장 성공한 평화협정이면서, 동시에 가장 불완전한 평화협정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불완전성이 오늘의 중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는 다음 편에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사다트에게 아직 묻지 않은 질문

그가 선택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려진 것은, 암살 당일 아침 사다트가 측근들에게 남겼다는 한 마디다. “나는 이집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암살 직후 이집트에서 그는 배신자였다. 묘소는 카이로 외곽 군사기념관에 있었지만, 참배객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가 40년을 넘기면서 평가는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집트는 전쟁을 피했다”는 목소리가 조용히 늘었다. 무슬림형제단 진영에서 “파라오”라는 낙인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역사는 아직 판결을 유보하고 있다.

콜린스가 죽고 100년 뒤, 아일랜드는 그를 국민 영웅으로 기린다.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는 조선을 구했고, 그는 훗날 영의정이 됐다. 시대가 단죄한 자를, 역사가 복권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휴전선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발언이 되기도 한다. 대화를 꺼낸 자는 적에게 무릎 꿇은 자로 불리고, 협상 테이블에 앉은 자는 민족을 판 자로 낙인찍힌다. 배신자라는 말이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은, 평화가 가장 가까이 온 순간이다. 그것은 카이로에서도, 더블린에서도, 남한산성에서도, 여의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평화와 배신이라는 양면의 거울을 마주한 채, 바라보는 자의 기록은 중동의 끝나지 않은 전선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 참고할 말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9


각주 및 출처

1 1977년 이집트 빵 폭동: 1977년 1월 18~19일 발생. IMF 권고에 따른 식량 보조금 삭감 조치가 촉발. 사망 79명, 부상 550명 이상. Raymond Hinnebusch, Egyptian Politics under Sadat (1985). 사다트는 이후 보조금 삭감을 전면 철회했다.

2 캠프 데이비드 13일: Jimmy Carter, Keeping Faith: Memoirs of a President (1982). 베긴의 사진 일화 포함. William Quandt, Camp David: Peacemaking and Politics (1986).

3 마이클 콜린스 1921년 조약: Tim Pat Coogan, Michael Collins: A Biography (1990). “나 자신의 사형 영장에 서명했다”는 발언 기록.

4 최명길 주화론: 《인조실록》 14년(1636) 병자호란 기사. 최명길의 발언은 문집 《지천집(遲川集)》 및 《국조보감(國朝寶鑑)》 참조.

5 여운형 암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우익 성향 청년 한지근의 저격으로 사망. 좌우합작위원회 활동 경위는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2005) 및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 참조.

6 김구 암살: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사망. 안두희의 동기는 김구의 1948년 평양 방문 및 남북 협상에 대한 반공적 신념에 따른 단독 행동으로 알려져 있다. 배후는 확인된 바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 참조.

7 이승만 저격 미수: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동 광장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식장. 의열단 출신 전직 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가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 범인 현장 체포.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 참조.

8 사다트 암살: 1981년 10월 6일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 중위 등 ‘알 지하드’ 조직원 저격. Lawrence Wright, The Looming Tower (2006).

9 사다트의 이슬람 세력 활용: 집권 초기 좌파·나세르주의자 견제를 위해 무슬림형제단 사면 및 활동 허용. Gilles Kepel, Muslim Extremism in Egypt (1985). 알 지하드(Egyptian Islamic Jihad)는 사이이드 쿠틉(Sayyid Qutb)의 원리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생적으로 형성된 급진 비밀 결사체로, 무슬림형제단의 온건 노선에 반발하며 등장했다. 사다트가 무슬림형제단에 허용한 정치적 공간이 이들에게도 활동 환경을 제공했다.

10 아랍연맹 이집트 제명: 1979년 3월 평화조약 체결 직후 본부 카이로→튀니스 이전 및 제명. 재가입은 1989년.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 연간 약 13억 달러(군사 원조 기준), 경제 원조 약 8억 달러를 포함해 총 20억 달러 이상의 지원을 받게 됐다.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보고서 참조.

11 캠프 데이비드 팔레스타인 자치 조항의 한계: William Quandt, Camp David: Peacemaking and Politics (1986). 자치 조항이 실질적으로 이행되지 않은 경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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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중동】 이스라엘과 아랍 — 끝나지 않는 전쟁의 뿌리

① 땅을 기억하는 자들의 나라 (B.C. 2세기~1948)

② 이긴 자가 잃은 것들 (1948·1956·1967)

③ 속죄의 날, 신화가 무너지다 (1973)

④ 배신자라 불린 평화주의자 (1978·1981) — 현재 글

⑤ 직접 싸우지 않는 전쟁 (1987~2023) — 예정

⑥ 트럼프는 중동을 멈출 수 있는가 (2025~2026) —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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