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를 실어 나른 사람들

달러를 실어 나른 사람들

원양어업과 외화 — 산업화의 숨은 축

외항선원 시리즈 2편 · 바다 · 2026.07.16


참치 수출액 한 푼에 담긴 국가의 명운

2026년 올해에도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는 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품목의 맨 앞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화려한 통계가 쓰이기 훨씬 전, 이미 그 자리를 지키던 이름은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참치였다.

1957년 6월,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10톤의 참치를 싣고 부산항으로 돌아왔을 때1, 그 참치는 국내의 밥상에 오르지 않았다. 전량이 해외로 팔려 외화가 되었다. 국내에 참치캔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더 지난 1982년, 김재철 당시 동원산업 사장이 미국 스타키스트 공장을 견학한 뒤였다11. 반도체 이전에 참치가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낯선 것은, 그 참치조차 국민의 몫이 아니라 국가의 달러였다는 점이다.


외화가 국가의 목숨줄이었던 시절

1950년대 후반, 한국을 지탱하던 미국의 원조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1957년 3억 8,3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원조액은 1965년 1억 3,100만 달러로 급감했고, 1973년에는 사실상 소멸했다2,3. 원조가 사라진 자리를 채울 것은 스스로 벌어들이는 외화뿐이었다. 문제는 팔 것이 거의 없었다는 데 있었다.

1962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하며 원양어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편입시켰다4. 국가는 대일청구권 자금과 상업차관으로 어선을 사들였고, 노르웨이·네덜란드 차관으로 대형 트롤선을 도입했다5. 그리고 그 배에 사람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다. 공장을 지을 기계도, 그 기계를 살 달러도 없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가장 먼저 수출한 것은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이었다.

결과는 국가의 기대를 넘어섰다. 참치는 1960~70년대 한국의 주요 수출원으로 자리 잡았고6, 1976년에는 319척의 원양어선이 세계 각지 해역에서 57만 톤을 어획했다7. 한 산업 관계자는 이 시기 원양어업이 파독 광부·간호사의 외화 송금액을 웃도는 규모로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고 회고한다8. 이는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산업화 초기 외화 조달 구조의 한 단면으로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방향이다. 화폐가 나라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바다로 나가고 그 다음에야 달러가 뒤따라 들어왔다. 산업화의 서사는 흔히 공장과 정책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배 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법가와 리바이어던, 두 개의 국가론

이 시기 국가와 개인 노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동서양의 두 국가론이 겹쳐질 수 있다.

한비자는 국가의 부강을 이렇게 설명했다.

夫富國以農,距敵恃卒。(부국이농,거적시졸。)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농사이며, 적을 막는 것은 병사에 달려 있다.”
— 한비자, 『한비자』 오두9

한비자에게 국가의 존립은 도덕적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 생산력과 동원력에서 나왔다. 1960년대 한국 정부가 원양어업을 국가 전략으로 편입시킨 방식은 이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면이 있다. 선원은 애국심의 발로라기보다, 국가가 생존을 위해 동원한 원초적 자원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선을 바꾸어 선원을 홉스의 눈으로 보면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그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개인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국가에 위탁하고, 그 대가로 생존을 보장받는다10. 원양선원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모한 도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담보로 국가와 계약을 맺고, 그 대가로 가족의 생계와 마을에서의 자리를 요구한 주체이기도 했다. 한비자의 국가가 부국을 위해 백성을 셈했다면, 홉스의 개인은 그 셈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협상하고 있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외화가 되던 방정식

한비자와 홉스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국가는 위기 앞에서 개인의 노동을 가장 절박한 자원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은 그 동원에 응하는 대가로 자신의 존엄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그 자원은 공장 노동자이기 이전에 원양선원이었다.

외화, 어선, 선원이라는 세 단어는 그 시절 하나의 방정식으로 묶여 있었다. 외화가 없으면 기계를 살 수 없었고, 기계가 없으면 공장을 지을 수 없었다. 이 선행 단계의 외화를 벌어들인 원동력은 다름 아닌 바다 위의 노동이었다. 반도체와 자동차로 상징되는 오늘의 수출 강국은, 이 원초적 방정식 위에 세워진 결과일 수 있다.


다음 달러는 누구의 손에 실려 있는가

지금 한국의 무역수지는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가 지탱한다. 그러나 그 통계표 어디에도 1966년 라스팔마스로 떠났던 사람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나라가 바다를 필요로 했을 때에서 그 시절 선원이 어떻게 국가적 영웅으로 승인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번 편은 그 영웅의 자리를 가능하게 했던 숫자, 곧 달러의 흐름을 추적해 보았다.

왕 앞에 설 만큼 귀하다던 그 능숙한 이들이, 지금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왜 가장 천한 자의 역사처럼 지워져 갔는가. 역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국가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자원이 사람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다시 무형의 무엇인가로 옮겨갈 때, 그 이전 세대가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몫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통계표에는 잡히지 않지만 실은 나라의 다음 달러를 실어 나르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 참고할 말씀: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 잠언 22:29


주1. 국제신문, “e-사람들: 원양산업 진출 역사 주인공들 기억해야” (2017.05.08)
주2.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국제원조’
주3. 위와 같음
주4. Encyves Wiki, ‘원양어업’; 경제개발 5개년계획 관련 서술
주5. 위와 같음
주6.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원양어업’
주7. 위와 같음
주8. 국제신문, 위의 글 (2017.05.08), 한국원양산업협회 관계자 발언 취지 인용
주9. 韓非, 『韓非子』 五蠹
주10. Thomas Hobbes, 『리바이어던(Leviathan)』 중 사회계약론
주11. 김재철 당시 동원산업 사장은 1981년 미국 스타키스트 LA공장을 견학한 뒤 국내 참치캔 출시를 결심했고, 1982년 12월 국내 최초로 ‘동원참치 살코기캔’을 출시했다.

© Watchman, 바라보는 자의 기록 (bara.watchmaninsight.com). 무단 전재 및 2차 창작 시 사전 동의 필요.

📢 새 글 알림 받기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