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어디서 오는가

군중은 어디서 오는가 — 나치즘과 진승오광의 난이 공유한 하나의 법칙

고립된 개인이 군중이 될 때: 1930년대 독일과 진나라 말기의 구조

이중의 수축: 한국의 현실로 읽는 세계 현대사의 구조 | 제4편 · 2026년 6월 · Watchman

※ 앞선 글에서 우리는 혼자 사는 시대, 분노가 알고리즘의 회로를 따라 어떻게 흐르는지를 살펴보았다. → 제3편: 원룸의 정치학 — 혼자 사는 시대, 분노는 어디로 흐르는가


폭군이 쓰러지면 왜 또 다른 폭군이 오는가

2024년 겨울, 계엄 선포 이후 국회가 해제를 의결했고, 광장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그 장면은 여러 방식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분노의 잔열이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성별 갈등, 세대 균열, 지역 감정, 교육 경쟁, 부동산 양극화 — 이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 지층 깊이 존재하던 구조였다. 2024년 겨울, 각자가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건은 그 균열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균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균열은 심화되고 있다.

이 현상 앞에서 우리는 익숙한 설명들을 꺼낸다. 정치인의 선동, 언론의 편향, 소셜미디어의 부작용. 이 설명들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왜 선동은 지금 이 시대에 이토록 잘 작동하는가. 왜 분노는 구조를 향하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가. 왜 공동의 적을 물리친 사람들이 곧바로 서로의 적이 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으러 역사로 들어간다. 2,20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두 개의 사건 — 기원전 209년 중국 대택향(大澤鄕)의 농민 봉기와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 은 이념적으로 정반대의 사건이다. 하나는 최하층 피지배자의 절망적 반란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를 향한 중산층의 권위주의적 갈망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하나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 고립된 개인이 군중이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은 지금 한국에서 다시 작동하고 있다.

제국이 무너지기 직전,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이었다. 그는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바퀴 폭을 통일했다. 수백 년간 각 지역에서 유지된 봉건 질서를 해체하고 군현제를 실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개혁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개인의 정체성을 지탱해온 공동체의 언어, 관습, 위계를 일거에 파괴한 사건이었다.

진법(秦法)의 연좌제와 가혹한 형벌은 이웃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고발하면 포상이 따랐고, 고발하지 않으면 공범이 되었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법 앞에 홀로 섰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은 오늘날 사회학이 말하는 원자화의 초기 형태를 실험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 호해(胡亥)가 즉위한 기원전 209년 여름, 징발된 농민 900명이 대택향에 집결했다. 변경 수비를 위해 어양(漁陽)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폭우가 쏟아졌다. 길이 끊겼다. 기일을 어기게 되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일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공포가 이들을 지배했다.

이때 둔장(屯長)이었던 진승(陳勝)이 오광(吳廣)에게 말했다. “지금 도망가도 죽고, 봉기해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나라를 위해 죽자.(今亡亦死,舉大計亦死,等死,死國可乎? 금망역사,거대계역사,등사,사국가호?)”¹

이것은 혁명 선언이 아니었다. 이념이 없었다. 강령이 없었다. 비전이 없었다. 오직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고립된 개인들의 출구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봉기의 불길은 6개월 만에 수십만 명을 삼켰다. 각지에서 합류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진승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다. 진승의 이념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공유한 것은 단 하나였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이라는 감각이었다.

진승오광의 난은 실패했다. 진나라 장군 장한(章邯)이 이끄는 진압군에 의해 봉기 세력은 6개월 만에 궤멸되었고, 진승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열어젖힌 균열을 타고 항우와 유방이 진나라를 무너뜨렸다. 통일 이후 불과 15년 만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해 보였던 제국이 가장 빠르게 무너진 것은, 그 강력함의 원천인 중앙집권이 동시에 공동체 해체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12세기 후, 유럽의 반대편에서 같은 구조가 다른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했다. 민주주의 헌법을 가졌고, 의회가 있었고,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바이마르는 처음부터 두 개의 구조적 균열 위에 세워져 있었다. 첫 번째는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이었다. 1919년 6월 체결된 이 조약은 독일에 전쟁의 모든 책임을 귀속시키고, 1,320억 금마르크에 달하는 천문학적 배상금과 영토의 13%를 박탈했다. 패전국 국민이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그 치욕감은 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독일 사회 전체에 깊이 새겨졌다. 두 번째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해체된 전통 공동체였다. 수백 년간 독일인의 일상을 지탱해온 교회 공동체, 장인 길드, 농촌 마을 공동체, 지역 시민 협회 — 이 구조들이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 이주의 물결 속에서 빠르게 해체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개인들은 이 공동체가 제공하던 소속감, 상호부조, 정체성의 언어를 잃은 채 낯선 도시에 홀로 내던져졌다.

베를린과 함부르크와 뮌헨으로 몰려든 이주민들은 대부분 기존 공동체에서 뿌리가 뽑힌 개인들이었다. 교회와 길드와 지역 협회가 제공하던 소속감의 구조가 도시에는 없었다. 1923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저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1929년 대공황은 그나마 회복하던 경제를 다시 무너뜨렸다.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 전쟁 영웅이었으나 패전국의 패배자로 전락한 재향군인, 평생 모은 저축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소시민들 — 이들은 전례 없는 고독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치 운동이 이 고독에게 제공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빨간 깃발과 횃불과 제복과 구호가 만들어낸 ‘우리’라는 감각이었다. 소속감이었다. 그리고 적(敵)이었다. “유대인, 공산주의자, 바이마르 민주주의자” — 이 세 개의 적이 고독한 개인들을 하나의 군중으로 용접했다.

나치당 지지율의 궤적은 이 구조를 숫자로 보여준다. 1928년 2.6%였던 지지율은 대공황 이후 1930년 18.3%로 뛰었고, 1932년 7월 37.4%까지 치솟았다.² 물론 나치의 집권은 대중 심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933년 1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나치를 통제 가능한 도구로 여긴 보수 엘리트들의 치명적 오판이었다. 여기에 비례대표제의 과도한 분열과 대통령 긴급명령권 남용을 허용한 바이마르 헌법의 구조적 허점이 더해졌다. 제도의 실패와 엘리트의 오판이 대중에게 먹혀들 수 있었던 토양 — 그것이 바로 공동체 해체였다는 점을 이 글은 주목한다. 이 상승 곡선은 히틀러의 연설 능력의 산물이기 이전에, 공동체 해체의 속도를 반영하는 사회학적 데이터다.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이끌린 것이 아니었다. 고독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불만은 어떻게 군중이 되는가 — 동서양 철학의 교차점

1895년,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은 『군중심리(La psychologie des foules)』를 출판했다. 그가 관찰한 것은 당시 유럽을 흔들던 혁명과 폭동이었다. 그의 결론은 불편했다. 군중 속의 개인은 지적 수준이 하락하고, 감정의 전염성이 극대화된다. 이것은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다. 고독한 개인이 군중에 합류할 때 경험하는 해방감과 익명성의 논리다. 혼자일 때 지고 있던 불안과 책임이 군중 속에서 사라진다. 군중은 단순하고 절대적인 것을 원한다. 뉘앙스, 단서 조항, 복잡성 — 이것들은 군중의 언어가 아니다. 이후 사회심리학은 르봉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해 왔다. 그러나 군중이 개인의 판단을 변화시킨다는 통찰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문제 제기로 남아 있다.³

르봉이 군중의 외적 행동을 해부했다면, 한비자(韓非子)는 그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력의 구조를 분석했다. 한비자는 권력이 덕(德)이 아니라 세(勢), 즉 구조적 위치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진나라의 법은 세(勢)를 황제에게 극도로 집중시켰다.

法之所加,智者弗能辭,勇者弗敢爭。
(법지소가,지자불능사,용자불감쟁。)

“법이 가해지는 곳에서 지혜로운 자도 거부할 수 없고, 용감한 자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⁴

그러나 한비자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권력이 극단적으로 집중될 때, 그 집중이 역설적으로 최하층에게도 하나의 세(勢)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이라는 감각 — 이것이 진승오광에게 부여된 세(勢)였다. 잃을 것이 없는 자의 세(勢)는 제도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폭발한다.

르봉이 군중의 외적 행동을, 한비자가 그 행동을 가능케 하는 권력 구조를 설명했다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의 내면을 해부하려 했다. 프롬은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서 나치즘의 심리적 기반을 분석하며 역설적 명제를 제시했다. 근대가 개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자유는 동시에 고독과 불안을 주었다. 자유는 짐이다. 그 짐이 버거울 때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주의 운동에 복속한다. 나치즘에 열광한 독일 중산층은 세뇌당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로부터 도피한 것이었다.⁵

프롬의 분석과 진승오광의 난을 겹쳐놓으면 중요한 차이와 함께 하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이마르의 중산층이 느낀 것은 자유가 주는 불안이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고, 그 선택의 결과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근대적 고독이었다. 진나라의 농민들이 느낀 것은 달랐다. 선택지가 없었다. 도망가도 죽고 제자리에 있어도 죽는, 제도적 가혹함이 만들어낸 생존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방향은 정반대였다 — 하나는 과잉된 자유에서, 다른 하나는 완전히 박탈된 선택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개인을 군중으로 밀어넣은 힘은 같았다. 제도가 더 이상 개인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감각, 그리고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는 극한의 고립이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르봉의 군중심리학, 한비자의 세(勢),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 세 개의 서로 다른 사유가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고독한 개인은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하며, 그 소속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제도가 아닐 때, 군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군중의 언어는 항상 단순하고, 그 단순함의 핵심에는 항상 적이 있다.

수축이 만드는 군중 — 2,200년을 건너온 하나의 법칙

이 시리즈가 말하는 ‘수축’은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니다. 인구가 줄고, 경제 파이가 쪼그라들고, 신뢰가 무너지면서 개인이 기댈 수 있는 공동체의 밀도 자체가 얇아지는 복합적 과정이다. 수축 사회에서 자원이 희소해질수록 개인은 더 고립되고, 고립된 개인은 군중화에 더 취약해진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추적하는 ‘이중의 수축’의 핵심이다.

진승오광의 난과 나치즘은 이념적으로 정반대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 구조를 나란히 놓으면, 2,200년의 시간차가 사라진다.

진나라 말기, 군현제와 연좌제는 수백 년간 유지된 지역 공동체를 해체했다. 가혹한 세금과 요역은 개인을 법 앞에 홀로 세웠고, 진법의 공포는 이웃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다. 봉기의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자, 고립된 농민들은 처음으로 ‘우리’가 되었다. 적은 진나라 관리였다.

바이마르 독일에서도 같은 순서가 반복되었다. 급격한 도시화가 전통 공동체를 허물었고,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이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의회는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 집회와 제복과 깃발이 원자화된 개인들을 군중으로 용접했다. 적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였다.

2020년대 한국의 조건은 다르게 보이지만 구조는 같다. 1인 가구 1,000만이 사회적 신뢰의 붕괴 속에 흩어져 있고, 자산 양극화와 청년 실업과 부채가 경제적 불안을 구조화했다. 정치 냉소와 제도 불신이 공식 채널을 막아섰다. 그리고 대중 집회와 제복이 있던 자리에 알고리즘과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들어섰다. 적은 성별이 되고, 세대가 되고, 진영이 되었다. 매개가 달라졌을 뿐이다. 메커니즘은 2,200년을 건너 그대로다.

이 패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군중화의 속도다. 진승오광의 봉기가 수십만으로 번지는 데 6개월이 걸렸다. 나치당 지지율이 2.6%에서 37.4%로 오르는 데 4년이 걸렸다. 2024년 겨울 한국의 광장은 계엄 선포 6시간 만에 채워졌다. 그리고 2026년 6월, 선거 결과가 나온 밤에도 광장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시대의 군중화는 역사상 가장 빠르다. 그리고 가장 빠른 것은 가장 통제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패턴이 있다. 군중은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해산하지 않는다. 진승오광의 봉기는 진나라를 무너뜨렸지만, 봉기 세력은 곧바로 내부에서 분열했다. 나치즘은 바이마르를 해체했지만, 그 이후 적을 유럽 전체로 확장했다. 군중은 적이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찾는다. 공동의 적을 물리친 사람들이 곧바로 서로의 적이 되는 것은 역사의 예외가 아니라 패턴이다.

2026년 6월의 한국 정치 지형은 이 패턴의 현재 진행형이다. 다양한 사회조사가 반복적으로 확인하듯, 한국의 사회적 신뢰 지수는 OECD 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세대·성별·계층 간 갈등 체감도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2024년 겨울, 각자가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건이 가시화한 균열들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방향을 잃은 분노는 가장 가까운 경계선을 따라 흐른다. 성별, 세대, 지역, 진영 — 이 경계선들은 새로 그어진 것이 아니다. 수축하는 사회에서 자원이 희소해질 때 가장 즉각적으로 가시화되는 경계선들이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진승오광의 난 이후의 분열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경로를 선택할 수 있는가.

수축의 법칙을 깰 수 있는가 — 한국 지성계에 남겨진 질문

역사는 공동체 해체와 군중화가 반드시 파국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 위에 유교적 공동체 언어를 얹었다. 법으로 원자화된 개인을 도덕적 공동체의 언어로 다시 묶는 작업이었다. 완전하지 않았고 모순도 많았지만, 그 사회 계약은 400년을 버텼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패했다. 그러나 패전 이후의 서독은 달랐다. 기본법(Grundgesetz)으로 제도를 재설계하고, 과거사 청산으로 공동의 언어를 만들고, 사회적 시장경제로 중산층의 불안을 구조적으로 완충했다. 나치즘이 자랐던 토양을 제도적으로 바꾼 것이었다.

역사에서 원자화 사회의 탈출 경로는 두 가지다. 폭발이거나, 새로운 공동체 언어의 발명이거나. 한국 사회는 지금 이 두 경로의 갈림길에 있다.

수축의 법칙을 깨기 위해 한국 지성계가 열어야 할 의제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알고리즘 거버넌스의 확립이다.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이제 사적 재화가 아니라 공공 인프라로 다루어져야 한다. EU 인공지능법(AI Act)이 채택한 ‘위험성 평가(Risk Assessment)’와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 원칙은 하나의 모델이다. 알고리즘이 분노를 증폭하는 방식을 사회적으로 검증하고, 이용자에게 추천 알고리즘을 거부하거나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 이것은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인프라의 문제다.

둘째, 1인 가구 시대의 공론장 재건이다. 아파트 단지의 커뮤니티 공간, 동네 공공 독서실, 세대를 혼합한 지역 시민 포럼 — 혼자이지만 정기적으로 타인의 의견과 충돌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재설계.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인프라다. 바이마르가 실패한 것은 헌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헌법의 내용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론장의 문화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적의 언어 대신 문제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진승오광의 난에서 농민들은 적을 지목했다(진나라 관리). 나치즘은 적을 발명했다(유대인). 2020년대 한국의 알고리즘은 적을 자동 생성한다(상대 진영, 반대 성별, 다른 세대). 지성계의 역할은 이 적의 언어를 문제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다.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서로를 적으로 볼 때, 지성계는 그 둘이 공통으로 직면한 구조적 문제 — 자산 없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세대의 공통된 조건 — 를 가시화해야 한다.

진승은 봉기를 시작하며 외쳤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영유종호?)” 이 말은 옳았다. 그리고 그가 만든 나라는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외침의 정당성과 그 외침이 만드는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은 별개의 질문이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왜 공동의 적을 물리친 사람들이 곧바로 서로의 적이 되는가. 이제 그 답의 윤곽이 보인다. 군중은 적이 있을 때 태어나고, 적이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찾는다. 그 악순환을 끊는 것은 더 강한 분노가 아니다. 분노가 향할 수 있는 구조 — 제도와 공론장 — 의 발명이다. 새로운 공동체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군중은 해산하지 않는다. 다음 적을 향해 방향을 바꿀 뿐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외침이 아니다. 외침을 담을 수 있는 제도와, 서로 다른 외침이 충돌하면서도 공화국을 유지하게 해주는 공론장이다. 결국 군중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사회의 수축이 만들어낸 결과다. 수축을 방치하면 군중은 반복되고, 수축을 완화하면 공동체는 다시 회복될 가능성을 얻는다.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이 시리즈에서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바로 그 갈림길이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데는 하나의 오래된 안타까움이 있다. 같은 역사를 놓고 각기 다른 진영이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나라. 이승만을 둘러싼 수십 년의 싸움이 그 상징이다. 한쪽은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려 했고, 다른 쪽은 그 자리를 되찾으려 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에서 역사는 공유 자산이 아니라 진영의 무기가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단골 질문은 “주적이 누굽니까?”다. 그 웃픈 상황을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그 결과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금기가 되었다. 공론장은 제도가 아닌 일상에서 먼저 무너졌다.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미 공론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 문을 다시 열 수 있는가.

*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거니와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 잠언 14:16


¹ 司馬遷, 『史記』 「陳涉世家」.
² Richard J. Evans,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Penguin Press (2003).
³ Gustave Le Bon, La psychologie des foules, Félix Alcan (1895).
⁴ 韓非子, 「有度」.
⁵ Erich Fromm, Escape from Freedom, Farrar & Rinehart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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