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론장(公論場)이 죽는 방식
TBC의 폐허에서 탄생해 정점을 찍고 스러진 — 한 방송국이 압축한 한국 현대사 46년
2026년 6월 16일 · 역사·한국 현대사 · Watchman
앞선 글에서 우리는 권력이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항거를 통제하려 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의 방패
불꽃은 두 번 꺼진다
2024년 연말, JTBC 뉴스룸의 시청률 성적표는 조용했다. 2016년 10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폭로하는 태블릿 PC 보도가 전파를 탄 직후 이 방송사의 뉴스 시청률은 KBS·MBC를 제치고 단독 1위를 기록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JTBC의 뉴스 신뢰도는 언론사 중 1위였다.¹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지금 JTBC는 콘텐트리중앙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지주사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있고, 뉴스 부문은 그룹 수익 구조에서 계륵(鷄肋)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업계에 팽배하다.²
그러나 이 서사를 “손석희 이후 JTBC가 망했다”는 단선적 이야기로 읽으면 안 된다.
JTBC의 흥망은 특정 앵커의 개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공론장(公論場)’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소비되며,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보여주는 46년의 압축 기록이다. 1980년 11월 30일, 신군부의 명령으로 동양방송(TBC)이 마지막 방송을 내보낸 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방송국이 걸어온 길은 언론사(言論史)가 아니라 권력사(權力史)이자, 공론의 생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한국 사회 자체의 자화상이다.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1980년의 강제 폐업과 2011년의 부활, 2016년의 정점과 현재의 침체 — 이 네 좌표를 잇는 선을 그었을 때,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핵심적인 반복 패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국가 권력은 언론을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룬다. 칼로 베거나, 돈과 제도로 길들이거나. 그리고 지금, 세 번째 방식이 추가됐다. 알고리즘과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공론장을 스스로 해체하도록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것이다. 이 세 단계의 궤적이 JTBC 46년에 모두 담겨 있다.
1980년 11월 30일 자정 — TBC의 마지막 방송
그날 밤, 동양방송(TBC)의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직원들은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회선이 정리되고 있었다. 1964년 개국 이래 16년간 MBC와 함께 한국 최고의 민영 방송사 자리를 다퉜던 TBC는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³
명분은 ‘언론 자유화와 공영방송 체제 확립’이었다. 실제는 달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가 정변을 일으켰다. 권력의 공백기에 한국 언론은 잠시 숨을 쉬었다. 기자들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보도를 쏟아냈다. 신군부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1980년, 신군부는 ‘언론 자유화’라는 이름 아래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172개 정기간행물이 폐간됐고, 전국 언론인 1,000명이 강제 해직됐다. 방송은 더 단순했다. TBC와 동아방송(DBS)은 KBS에 흡수됐다. TBC는 KBS 2TV로 편입됐다.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흡수의 방식이다. TBC의 자산과 콘텐츠, 주파수는 국영 KBS로 이전됐다. 그러나 TBC를 TBC이게 했던 것 — 민간 자본과 대중문화가 결합하여 이룩했던 ‘방송 공론장의 DNA’ — 은 이전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말소(抹消)됐다. 국가 권력에 의해 민간 방송이 소멸되는 것이 하룻밤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그날 밤 처음으로 눈으로 확인했다.
TBC의 대주주는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었다. 그의 아들 홍석현이 중앙일보를 물려받았다. 두 세대에 걸쳐 이어진 것은 재산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국가에게 빼앗겼다는 기억, 그리고 언젠가 되찾겠다는 집념. 그 집념이 31년 뒤 어떤 형태로 귀환하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JTBC의 탄생은 절반만 읽힌다.
2011년 — ‘부활’이라는 이름의 역설
2011년 12월 1일, JTBC가 개국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미디어법 개정을 통해 신문사와 대기업의 방송사 소유를 허용했다. 결과는 단순했다. 중앙일보 계열의 JTBC, 조선일보 계열의 TV조선, 동아일보 계열의 채널A — 보수 성향 대형 매체들이 줄줄이 종합편성채널 면허를 받았다.
JTBC는 개국 기자회견에서 ‘TBC의 부활’을 선언했다.⁵
여기서 비극의 씨앗이 처음으로 뿌려진다. 이 ‘부활’은 민주화와 시민의 힘으로 쟁취된 것이 아니었다. 보수 정권이 주도한 미디어법 개정의 수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TBC를 빼앗은 것도 국가 권력이었고, JTBC를 돌려준 것도 국가 권력이었다. 두 번의 국가 개입 사이에서, 중앙일보 그룹은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이용해 방송권을 되찾았다.
개국 초기 JTBC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종편 4사 모두 저조한 시청률로 출발했다. 그때 JTBC가 선택한 것이 있었다. 보수 자본의 방송사로서 예상되는 콘텐츠 노선과 전혀 다른 방향의 저널리즘 인물을 영입한 것이다.
2013년, 손석희가 JTBC 보도부문 사장으로 왔다.
이것이 두 번째 씨앗이다. 보수 자본과 비타협적 저널리즘 인물의 결합 — 이 조합이 만들어낸 것은 탁월한 저널리즘이었지만, 동시에 내부에 해소되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시작한 것이었다. 체제 내 전복인가, 자본의 고도화된 생존 전략인가. 그 질문의 답은 2016년 10월에 잠시 유예됐고, 이후 수년에 걸쳐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간언(諫言)하는 자들의 전성기와 타락 — 조선 삼사(三司)와 JTBC
조선 시대에는 삼사(三司)라는 언관 기구가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이 그것이다. 이들은 왕과 외척의 권력을 견제하고,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는 제도적 기구였다. 조선 중기까지 이들이 유지했던 도덕적 권위는 상당했다. 왕조차 삼사의 탄핵 요구를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삼사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타락했다. 타락의 원인은 왕의 탄압이 아니었다. 삼사 스스로가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공론 기구에서, 당쟁(黨爭)의 전위대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선조~광해군 시기를 거치면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이 격화됐고, 삼사의 언관들은 상대 당파를 공격하고 제거하기 위한 논리를 생산하는 집단이 됐다. 탄핵의 대상이 권력의 부패에서 당파적 정적(政敵)으로 이동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삼사의 말이 자신들을 위한 것인지, 당파 싸움의 명분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⁶
삼사의 권위는 그렇게 스스로 소진됐다.
2016년 10월 24일 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입수해 국정농단의 실체를 보도했다. 수백만 명이 광화문과 전국 도시의 광장으로 나왔다. 대통령은 탄핵됐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 순간 JTBC는 단순한 방송사가 아니었다. 조선의 삼사가 수행했던 공론 형성의 기능을 현대에 가장 강렬하게 구현한 매체였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집한 증거에 기반해 공론장에 던진 그 보도는 — 목숨을 걸고 왕에게 직언을 날리던 조선의 대간들이 지향했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2017년 한국갤럽 조사에서 JTBC의 뉴스 신뢰도는 32%였다. KBS는 17%, MBC는 8%였다.⁷ 이 수치는 단순한 시청률 지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공론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회적 지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두 번째 비극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2019년 — 회색지대에 선 자가 먼저 돌을 맞는다
조선의 삼사가 타락한 것은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론 형성의 권한이 삼사에 집중되자, 삼사의 언관이 되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됐다. 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당파적 경쟁이 시작됐고, 삼사는 도덕적 중립성 대신 당파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기구로 변질됐다.
JTBC가 한국 사회 공론장의 사실상 유일한 독점적 중심이 된 2017년 이후, 비슷한 역학이 시작됐다. 그리고 2019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JTBC의 고독한 위치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JTBC는 검찰 수사와 의혹 제기를 저널리즘의 원칙에 따라 보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촛불의 동지’라 믿었던 진보 진영에게는 배신으로 읽혔다. 검찰발(發) 의혹 보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중계한다는 거센 비판이 쏟아졌고, 이는 서초동 촛불집회 등으로 표출됐다. 한편 보수 진영에게 JTBC는 여전히 편향 언론의 연장선이었다. 공론장이 사실(Fact)의 전쟁터가 아닌 신념의 성전(聖戰)이 되었을 때, 회색지대에 서려는 자가 가장 먼저 돌을 맞는다.
이것이 조선 삼사가 무너진 방식과 정확히 겹친다. 탄핵의 칼이 당파에 따라 선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때 삼사의 권위가 소진됐듯이, JTBC의 독립성에 대한 의심이 양쪽 모두에서 동시에 제기됐을 때 그 신뢰는 빠르게 균열했다. 공론장이 모든 사람의 것이기를 멈추는 순간, 그것은 진영의 것이 된다. 그리고 진영의 공론장은 반드시 반대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다.
세 개의 역사적 거울 — 바이마르, 해방 정국, 로마
역사는 이 패턴을 여러 번 반복했다.
1919년 출범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미디어 환경은 극도로 파편화됐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수십 개의 신문들이 저마다의 ‘진실’을 쏟아냈다. 산업 자본가 후고 슈티네스(Hugo Stinnes)는 1920년대 초반 언론사들을 대거 매입하며 상업주의와 정파성을 교묘히 결합했다.⁸ 바이마르의 미디어 파편화는 단순히 ‘많은 신문이 생겼다’는 현상이 아니었다. ‘공유된 사실(shared facts)’의 붕괴를 의미했다.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확인해주는 매체만을 선택했고, 서로 다른 사실을 믿는 시민들 사이의 공론이 불가능해졌다. 민주주의는 공유된 사실의 기반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 기반이 사라졌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의 운명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의 언론은 폭발했다. 수십 개의 신문과 잡지, 정치 단체 기관지가 쏟아졌다. 그러나 신탁통치 찬반(찬탁·반탁) 논쟁이 격화되면서, 언론은 좌우 진영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중도적 시각을 견지하려 했던 매체들은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중도’는 설 자리를 잃었고, 생존을 위해 진영을 택해야 했다.⁹ 해방 정국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다양성의 풍요가 아니라, 공론의 불가능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키케로(Cicero)가 원로원에서 카틸리나(Catilina)의 음모를 탄핵한 것은 기원전 63년이었다. 그 연설은 로마 공론장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의 공론장은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원로원의 논쟁이 점점 더 파벌과 개인적 이해관계로 오염됐고, 시민들은 원로원의 말을 더 이상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신뢰하지 않게 됐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넌 것은 그 신뢰의 소진 이후였다.¹⁰
세 사례의 교훈은 하나다. 공론장은 제도적 기구보다 신뢰의 생태계에 가깝다. 그 신뢰가 소진됐을 때, 어떤 제도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칼에서 제도로, 제도에서 알고리즘으로
역사의 패턴을 이 지점까지 따라오면, 하나의 선명한 구조가 드러난다.
1980년의 신군부는 TBC에 칼을 댔다.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2011년의 미디어법은 돈과 제도로 언론 지형을 재편했다. 특정 자본이 방송권을 얻고, 특정 자본이 방송권을 잃는 구조를 법제화했다. 두 방식 모두 국가 권력이 언론에 직접 개입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2020년대의 방식은 다르다. 권력은 이제 직접 칼을 들 필요가 없다. 알고리즘과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공론장을 스스로 해체하도록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유튜브 생태계의 진영 알고리즘을 해체하려는 의지를 보인 적은 없다. 오히려 진영 미디어의 폭발적 성장은 정치적 동원의 도구로서 기능하며 권력의 이해와 교차한다.
이것이 3단계의 완성이다. 칼 → 돈과 제도 → 알고리즘과 방임. 각 단계에서 공론장은 조금씩 더 좁아졌다.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 당일.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현장을 영상으로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 영상들이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확산된 곳은 유튜브였다. 알고리즘은 분노에 반응했다. 진영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각각의 생태계에서 ‘사실’로 굳어지는 속도는 레거시 미디어의 검증 사이클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그 국면에서 JTBC를 비롯한 레거시 미디어의 보도는 신중했으나 둔중했다. 유튜브가 분노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공론장을 폭파하는 동안, ‘제도권 언론’의 게이트키핑 시스템은 대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것은 JTBC의 실패가 아니라, 레거시 저널리즘이 알고리즘 시대에 처한 구조적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검증을 위해 시간이 필요한 저널리즘은, 분노가 이미 ‘사실’로 고착되고 난 뒤에 도착한다.
정치 권력의 교체와 관계없이, 진영 정치는 공고해졌고 레거시 미디어를 대하는 권력의 도구주의적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 진영의 권력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미디어 생태계를 선호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편향’으로 규정하는 문법을 공유한다. 공론장은 이 쌍방의 도구주의 사이에서 서서히 소진된다.
자본의 논리와 저널리즘의 영혼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JTBC의 모기업 콘텐트리중앙은 극장 체인, 연예 매니지먼트, 드라마 제작사 등 엔터테인먼트 전반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 그룹 구조에서 뉴스 부문은 수익을 내기 어렵다. 뉴스는 비용 센터다. 드라마와 영화와 달리, 광고 수익과 구독료로 수지를 맞추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이것은 JTBC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자본에 종속되는 순간 저널리즘이기를 멈추는 — 그 구조적 모순 앞에 현대 언론 전체가 서 있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렇게 말했다.
法不阿貴,繩不撓曲。
(법불아귀,승불요곡。)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에 휘지 않는다.”
— 韓非子, 《韓非子》, 〈有度〉편, 기원전 3세기¹¹
한비자가 경계한 것은 기준의 사사로운 운용이었다. 법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기 시작하는 순간, 법은 중립적 기준이 아니라 권력의 외피가 된다. 저널리즘에 이 원칙을 대입하면, 그 함의는 선명하다. 보도의 기준이 자본의 이해관계 앞에서 굽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저널리즘이 아니다. 외부 권력을 비판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을 장악한 자본으로부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자기 규율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비판 저널리즘은 — 역사는 그것을 때로는 순수한 저항으로, 때로는 다른 자본의 이해관계를 위한 도구로 읽는다.
우리가 다시 같은 광장에서 만날 수 있는가
TBC는 국가 권력의 칼에 의해 사라졌다. JTBC는 국가 권력의 제도 변경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자본의 논리와 알고리즘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권력 앞에서 침체하고 있다.
비극은 선과 악의 싸움에서 오지 않는다. 올바른 가치와 또 다른 올바른 가치가 충돌할 때 온다. 저널리즘의 독립성이라는 가치, 자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조건, 공론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요청, 그리고 알고리즘이 공론장을 해체하는 기술적 현실 — 이 네 가지는 각각 옳고,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양립하기 어렵다.
조선의 삼사가 무너진 방식을 기억한다. 백성을 위해 존재했던 기구가, 당파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 언관의 말이 공론이 아닌 무기가 됐을 때. 그 타락의 끝에서 백성들은 더 이상 삼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는 2026년 6월의 혼란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에게 아직 공론장이 남아 있는가. 서로 다른 사실을 가진 채 각자의 알고리즘이 만들어준 디지털 동굴 속으로 흩어진 우리가, 다시 같은 광장에서 같은 사실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1980년 11월 30일 자정, TBC가 꺼진 그 화면처럼 — 공론장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그러나 돌이키기 어려운 속도로 어두워진다. 칼이 아니라 알고리즘으로, 폭력이 아니라 방임으로, 탄압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바라보는 자의 기록이 이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 참고할 말씀: ‘지혜로운 자의 말들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 전도서 12:11
¹ 한국갤럽, 「언론사 신뢰도 조사」, 2017년 1월. JTBC 신뢰도 32%, 언론사 중 1위 기록.
² 콘텐트리중앙 IR 자료 및 미디어 업계 평가 종합. 뉴스 부문 수익 구조에 대한 업계 공통 평가.
³ 정진석, 《한국 언론 100년사》, 나남, 2001 참조. TBC 마지막 방송 1980년 11월 30일.
⁴ 언론연구원, 《한국언론연보》, 1981. 정기간행물 172개 폐간, 언론인 1,000여 명 해직.
⁵ JTBC 개국 기자회견, 중앙일보 보도, 2011년 12월 1일.
⁶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4, pp. 312–340. 조선 삼사와 당쟁의 관계.
⁷ 한국갤럽, 「언론사 신뢰도 조사」, 2017년 상반기. KBS 17%, MBC 8%, JTBC 32%.
⁸ Gerald D. Feldman, The Great Disorder: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 in the German Inflation 1914–1924,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p. 470–490.
⁹ 정진석, 《극비 이승만과 한민당》, 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pp. 88–120. 해방 정국 언론 지형 분석.
¹⁰ Mary Beard, SPQR: A History of Ancient Rome, Profile Books, 2015, pp. 232–260.
¹¹ 韓非子, 《韓非子》, 〈有度〉편 (기원전 3세기).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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