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한 왕이 민심을 얻는 방식

검소한 왕이 민심을 얻는 방식

신라 파사 이사금,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절검의 정치학

2026.07.08 · 역사·철학

예산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연말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곳간을 아끼겠다”고 말한다. 관용차를 줄이겠다, 특수활동비를 투명하게 쓰겠다, 국민 세금을 내 돈처럼 여기겠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 신뢰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반복해서 확인될 때, 유권자는 “검소함”이라는 단어 자체에 냉소를 갖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냉소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도자가 재물을 아끼는 태도로 민심을 얻으려 했다는 기록은, 국가가 성립한 이래 거의 모든 문명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검소함이 실제로 신뢰를 만들어낸 사례와 만들어내지 못한 사례가 갈린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신라 초기의 한 왕에게서, 그 질문에 대한 오래된 대답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80년, 절검의 왕이 즉위하다

서기 80년 8월, 신라의 4대 왕 탈해 이사금이 세상을 떠나고 파사 이사금이 그 자리를 이었다. 본래는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이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신하들은 “일성이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며 파사를 세웠다. 능력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즉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그의 성품을 짧지만 분명하게 기록한다. 절도 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끼는 생활을 했고, 백성을 사랑하여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은 말로 그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인 81년 3월, 그는 직접 주와 군을 순행하며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중죄가 아닌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즉위하자마자 재물을 아끼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아낀 곳간을 실제로 백성 앞에서 열었다는 점이 이 기록의 핵심이다.

이 시기 신라는 아직 한반도 동남부의 작은 소국 연맹체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 유역을 두고 주변 소국들과의 긴장이 이어졌고,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세력이 무역과 철산지를 장악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국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않은 상황에서, 파사 이사금이 택한 전략은 무리한 팽창이 아니라 내부 자원의 관리였다.

주목할 것은 이 절검이 단순한 개인적 미덕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작은 나라가 강대국들 틈에서 살아남으려 할 때, 재정의 건전성은 곧 군사력이자 외교력이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나눠줄 곡식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는, 그 다음 세대의 충성도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훗날 그가 성곽을 정비하고(87년, 가소성·마두성) 월성을 쌓아 왕궁을 옮길(101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즉위 초의 재정적 절제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사 이사금의 절검은 도덕적 선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재정 전략에 가까웠다.

절용이애인 — 씀씀이를 아끼는 것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 사이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節用而愛人 (절용이애인) — “씀씀이를 절제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이 여섯 글자는 얼핏 평범한 도덕적 훈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장이 흥미로운 것은, 절용(節用)과 애인(愛人)을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 하나의 인과 관계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씀씀이를 아끼는 것이 먼저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결과로서 드러난다는 논리다.

이 원리는 파사 이사금이 즉위하기 불과 십여 년 전, 지구 반대편 로마에서 이미 놀라운 형태로 반복된 바 있다. 서기 69년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이야기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로 도심이 불탄 자리에 네로 황제는 도무스 아우레아, 이른바 ‘황금 궁전’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거대한 인공 호수와 정원이 딸려 있었다. 그러나 이 화려함은 철저히 황제 개인의 소유였고, 네로가 이 땅을 헐값에 강제로 사들였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네로 사후 내전을 거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황금 궁전을 헐어버리기로 했다. 그는 궁전 부지, 그중에서도 정확히 그 인공 호수가 있던 자리에 원형경기장 — 오늘날의 콜로세움 — 을 짓기로 했다. 건설 재원은 유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충당했다. 황제 한 사람의 사적인 호수를 메우고, 그 자리에 시민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세운 것이다. 그는 이 공사를 두고 “네로가 강제로 빼앗은 땅을 로마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파사 이사금과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로를 알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혼란기에 즉위하여 이를 수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아가 절약하거나 확보한 재원을 결국 백성에게 돌려주었다는 점에서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정을 함부로 열지 않는 태도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언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복되는 패턴으로 읽힐 수 있다.

철학은 모든 사건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계산에서 나온다

여기서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파사 이사금의 즉위 초 구휼과 베스파시아누스의 콜로세움, 그리고 공자가 말한 절용이애인은 모두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검소함이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 선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확인 가능한 결과 — 백성에게 돌아간 곡식, 시민에게 돌아간 부지 — 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과 행동이 어긋난 지도자들의 사례도 역사는 함께 기록한다. 검소함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특권을 유지한 권력자들에 대한 반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어떤 정치적 스캔들보다 빠르게 민심을 등 돌리게 만들었다. 민심은 왕이 무엇을 아꼈는가보다, 그 절제가 실제로 누구에게 돌아갔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신뢰를 확인하는가

파사 이사금의 절검은 화려한 정복 서사가 아니어서 후대에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의 조용한 재정 관리는 신라가 이후 팽창기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체력을 비축한 시기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도 ‘백성을 위한다’는 수사는 넘쳐난다. ‘백성을 사랑하기에 재정을 아낌없이 풀겠다’는 주장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절제 없는 지출이 결국 다음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면,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애인(愛人)’이라 부를 수 있는가는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파사 이사금이 곳간을 열어 구휼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전의 철저한 절제가 있었다. 아끼지 않고 베푸는 것과, 아꼈기에 베풀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얼마나 구분하고 있는가. 이는 특정 정당이나 세력만의 문제라기보다, 절검을 표방하는 모든 권력이 마주하는 오래된 시험대에 가깝다.

역사는 이 지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도자의 검소함을 무엇으로 확인하고 있는가. 선언으로 확인하는가, 결과로 확인하는가. 당장의 은과 금을 택할 것인가, 대를 이어 쌓이는 신뢰를 택할 것인가.

바라보는 자는 왕관의 크기를 세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아꼈고, 그것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오래 지켜볼 뿐이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낙동강 유역 소국들과의 거대한 결전(낙동강 주도권 결전) 역시, 이 조용한 내실의 시간이 뒷받침되었기에 비로소 승리로 매듭지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참고할 말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과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 잠언 22:1

¹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 이사금 조 — 즉위 배경(신하들의 추대) 및 즉위 2년(81년) 3월 순행·구휼·사면 기록.

² 콜로세움(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립 경위 —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인공호수 부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착공(70~72년경)과 유대 전쟁 전리품 재원.

³ 『논어』 학이편, “節用而愛人”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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